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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淵을 응시하는 자의 시선 … 슬픔은 어떻게 힘이 될까
深淵을 응시하는 자의 시선 … 슬픔은 어떻게 힘이 될까
  • 홍지석 객원기자
  • 승인 2009.06.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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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밖 미술비평_ <6>박완서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박완서의 작품을 이 코너‘미술밖 미술비평’이라는 주제로 다룰 때 먼저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 바로 이 작가의 문단 데뷔작 『裸木』(1970)이다. 이 소설은 우리 문학에서 ‘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흔치 않은 작품 가운데 하나로도 중요하지만, 이 주인공이 우리 근대미술의 중요작가인 박수근을 모티프로 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1985년에 박완서는 『나목』이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전기나 실화가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도, 박수근이 전쟁기 “극심한 가난 속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PX에서 싸구려 초상화를 그리던 모습이” 자신의 40세의 무사안일과 나태를 뒤흔들었으며 그래서 쓰게 된 게 『나목』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녀는 박수근이라는 작가가 “예술가들이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고는 견디어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의 암울한 불안과 혼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 고립돼 지내면서도 “어떻게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었나”에 관심을 갖게 됐노라고 회상한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이 소설에서 또 다른 주인공 이경은 젊은 시절 옥희도(이 인물이 바로 박수근을 연상케 하는 화가다)가 그린 나무 그림에서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 달리 말해 “빛과 빛깔의 빈곤, 그러니까 삶의 기쁨에의 기갈”을 본다. 하지만 중년이 된 그녀가 다시 옥희도의 유작전에서 그 나무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나무가 말라죽은 고목이 아니라 ‘봄에의 믿음’으로 의연히 겨울을 견디는 나목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화가(박수근)의 작업은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잃어버린 나를 복원하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박수근 작품의 해석에 대입해보자면 그녀의 글쓰기에는 미술사가나 미술비평가들의 메마른 글쓰기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체험적 진정성에 기반한 ‘공감’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화가 박수근의 예술은 소설가의 글쓰기를 빌려 오롯이 복원된다. 그래서 오늘날 박수근을 논하는 대부분의 미술비평가들은 박수근 그림 해석의 상당 부분을 박완서에 일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유홍준은 박수근을 평하는 글에서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고목’이 지닌 뜻은 아무래도 아래 박완서의 『나목』 끝부분을 읽어보는 것이 제격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체험적 진정성에 기반한 공감의 매혹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소영현의 지적에 따르면 박완서의 글쓰기는 “상흔으로만 남겨져 있던 자신의 경험들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인과율을 지닌 사건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며 그것이 “그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는 그녀 나름의 방식”이다.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이와 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복원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널리 알려진 단편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1994)에는 깨진 도자기 복원과 관련한 일화가 실려 있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어느 도자기 수집가 댁을 방문해 결손된 부분을 금으로 메꾼 연적을 구경한다. 그 수집가는 하필 비싼 금으로 결손 부분을 메꿔야 했을까. 빛깔과 질감이 비슷한 사기질로 감쪽같이 때울 수도 있을 텐데…. 수집가는 답한다. “그랬다가 아무도 이 연적이 깨졌다는 걸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요. 그건 속임수잖아요. 할 짓이 아니죠.” 하지만 박완서에게 진정한 복원은 이보다 좀 더 복잡한 문제다. 그녀는 묻는다. “망가지고 흩어진 걸 복원하는데 있어서 제 조각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딴 조각으로 메꾼 걸 진정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설사 그 딴 조각이 금이라 해도 말이다.”

    이렇게 진정한 조각을 찾는 일을 단념하지 않는, 아니 단념할 수 없는 복원가-소설가에게는 눈을 현혹시키는 것, 말하지 못하게 압도하는 것, 그래서 진정한 조각을 찾는 일을 훼방 놓는 것들이 적이다. 예컨대 그녀의 초기 수필집 『혼자 부르는 合唱』(1977)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정교한 신라 금관이나, 삼테기로 금을 쓸어담았다고까지 전해지는 무령왕릉 유물 전시실도 놀랍고 눈부시지만 나로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태평성대의 제왕이라도 한 몸에 그렇게 많은 금붙이를 지닌 인간을 상상하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거기보다는 원만하고 평화롭고도 좀 바보스럽게 웃는 石頭 등불상이 있는 방이 좋다. 바보스러우면서도 인간의 지혜가 짜낸 온갖 사상, 온갖 고뇌를 포용하고도 남을 것 같으니 또한 기막히다.”화려한 금관보다는 소박한 석불상을 좋아하는 소설가는 자연에서 훔친 진귀한 돌을 가져다 마치 자기 것인양 하는 수집가의 손에서 돌을 훔쳐내 衆愚의 시선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연으로 돌려놓고 싶어한다(『혼자 부르는 합창』, 1977). 이 소설가가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추악한 폐허와 악몽으로 기억하는 것(『잃어버린 여행가방』, 2005)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필집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1985)에 실린 「어떤 古家」를 보자. 여기서 박완서는 양옥을 한옥으로 개조하는 풍조를 개탄한다. “토담에 타일을 바르고 창호지문은 유리문으로 고치고 마루엔 모노륨이나 양탄자를 깔고 기와는 오지기와로 바꾸어” 집모양을 망쳐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강릉 경포대 근처에서 발견한 ‘열화당’에서 그녀는 수리란 명목의 횡포가 가해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전혀 손이 안 것처럼 원형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정성과 수리비가 곱절은 들어야 한다. 그 집 앞에서 그녀는 사람의 의무를 생각한다. “그 집을 온전히 잘 보존하는 게 후손의 의무라면 그 집 둘레에 서린 기품과 정적을 보존하는 건 우리 모두의 의무인” 것이다.

산만하고 가벼운 글쓰기의 역설
    사실 소설가 박완서는 본격적인 미술비평이라 할 만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미술에 관한 한 ‘아마추어’로 생각하며, 미술관에서 “다 보려 하다가 하나도 보지 못한 사람”(『두부』, 2002)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녀의 글에 묘사된 미술과의 만남에는 어떤 진정성있는 ‘믿음의 교감’같은 것이 있다. 이런 교감에 기반한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 산만하고 가벼워 보인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지금 “한겹 두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두부』).

    하지만 그 가벼움은 애당초 무게를, 억압을, 고통을 체험할 수 없었고 또 체험하고 싶어 하지도 않은 우리 시대 작가들이 추구하는 가벼움과는 진정 다른 종류의 것이다. 애당초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을 포기한 사람들이 절대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녀는 본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미술에 관해 쓴 글에서 전문비평가나 역사가들이 쓴 글에서 느끼지 못했던 어떤 깊은 감동, 슬픔, 또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런 감동, 이런 슬픔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산문집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2000)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 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고웁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 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안녕.”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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