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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담론’의 문제틀에 깔린 현실주의 혹은 ‘변혁적 중도주의’
‘창비담론’의 문제틀에 깔린 현실주의 혹은 ‘변혁적 중도주의’
  • 교수신문
  • 승인 2009.06.0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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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과제론』『87년체제론』『신자유주의 대안론』

『이중과제론』최태욱 엮음│창비│2009

『87년체제론』김종엽 엮음│창비│2009
『신자유주의 대안론』이남주 엮음│창비│2009

창비담론-『이중과제론』, 『87년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창비는 잡지와 책을 통해 꾸준히 담론을 생산해 왔지만, 창비담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제 이름표가 붙은 담론을 생산·유통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저항과 진보를 내용으로 한 잡지를 매개로 ‘자본’으로 전화한 드문 경우이면서도, 진보의 끈을 또는 끈은 놓지 않고 있는 창비가 흩뿌려져 있던 다양한 담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인 만큼, 지금-여기서 진보를 고민하거나 그에 맞서려는 이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담론’이란 단어가 흥미롭다.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담론이다. 담론은 규칙을 가진 말의 덩어리다. 담론의 담론이 연구대상일 정도로 담론의 정의를 내리기란 어렵지만,  담론의 문제설정에 동의하는 이들의 주된 관심 가운데 하나는, 담론의 사회구성적 능력이다. 담론이 현실을 만들어 간다, 이 명제야말로 담론생산의 유인이자, 담론생산에 참여하게 하는 매력적인 이유다. 창비는, 스스로 자임하는 것처럼, “단순히 공론의 장을 제공하는 일을 넘어 ‘창비식 담론’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려’ 한다.

담론생산이 권력에의 의지가 내장된 정치행위인 이유는 이 바꾸려함에 있다. 바뀌어야 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담론생산을 통해 지금-여기의 현실을 ‘지키려’ 하는 세력이 있다면, 담론투쟁은 불가피하다. 담론투쟁이 정치투쟁인 이유다. 따라서 한 담론은 다른 담론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차이와 배제를 생산하는 규칙은 한 담론의 형성을 위한 필수적 구성물이다. 푸코의 지적처럼, 담론의 규칙은 담론의 경찰이다. 차이와 배제는, 외부적으로는 진리/권력에의 의지를 통해, 내부적으로는 주석과 해석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창비담론의 담론분석을 위한 개략적인 출발점이다.

『이중과제론』은 창비담론총서 1번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창비담론의 핵심이라는 뜻일 게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는 ‘창비식 담론’의 바꿈을 표현하는 테제다. 백낙청의 말이다. “아마도 진정한 예술적·문학적 노력이란 어느 시절에든 주어진 현실과 더불어 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중과제’를 담고 있는 것이겠지만, 근대의 예술가들에게는 근대 세계체제의 엄청난 압력과 그 모순의 거대함으로 인해 그러한 과제가 더 강력하게 요구된다.” “문학적 상상력과 현장의 실천경험 및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의 결합을 꾀하는” 창비담론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백낙청이 추구하는 예술적·문학적 노력은 정치적 노력과 동의어다.

정치의 세계에선, 진리와 선이 나란히 가야 한다는, 말로 읽을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이중과제론은 정치의 세계에서 발생하곤 하는 인식과 전략의 괴리,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철학적으로 차단하는 또는 정당화하는,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권모술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얻어낸 결과론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바깥이란 원래 없었던 또는 없는 것이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넘어서는’ 기회를 볼 수밖에 없다는, 도저한 현실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기초가 이중과제론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싸우려는 담론권력에서 긍정성을 추출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권력의 지양태를 찾으려는 태도다. 세 권의 책에서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는 고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미완의 근대의 상징이면서 그 근대의 완성인 분단체제의 극복이 탈근대가 되는, 이중과제론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담론분석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이중과제론은 창비를 비롯한 저항세력이 정치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했음을, 즉 권력에 근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1987년 민주혁명의 효과가 바로 이것이다.

‘진보저항세력’이 박정희 시대에 이중과제라는 담론을 제기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력에 접근하게 된 ‘진보개혁세력’을 정당화하는 담론이 이중과제론일 것이다. 창비담론의 정치전략인 ‘변혁적 중도주의’는 바로 이 변화한 세계 속에서 다양한 진보를 묶는 대안이다. 창비담론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87년 체제를 미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의 직접적 뿌리가 87년에 닿아 있다는 인식 때문이”기보다는,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불러낼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함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대안론에서도 결국 성장담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명령으로 돌아가는 모습 속에서 도저한 현실주의가 가질 수밖에 없는 담론권력과 권력담론을 생각하게 된다.
백낙청은, 사실 이 문제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 “우리의 대응은 단순한 반국가주의에서 벗어나 더 적합한 국가구조의 창안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비담론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이 넘나듬의 인식이 먼저인지 아니면 넘나들었기에 넘나듬을 정당화하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문제는 또 다른 담론분석의 대상이지만, 권력관계의 극복이 아니라 권력관계의 재편일 수밖에 없다는, 도저한 현실주의를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설정은, 촛불시위를 보면서 우리가 분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족처럼 비켜가지만, 창비담론을 공고화하는 내부적 과정, 즉 주석과 해석, 수용할 수 있는 차이의 범위 그리고 창비담론 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유의 형용사와 부사를 이용해 내려봄을 풀어쓰기하는 닮은 꼴 문체 등등은, 담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를 위한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국제관계학 비판』등의 저서와 「지구적 통치와 국가형태」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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