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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적인 진실의 보편성 인정하고 생산적 불편 감수해야
복합적인 진실의 보편성 인정하고 생산적 불편 감수해야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6.01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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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허츠첼드 하버드대 교수 인터뷰

이번호에서 <교수신문>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마이클 허츠펠드 하버드대 교수(62)와 인터뷰를 했다. 마이클 허츠펠드 교수는 지난달 26일부터 29일까지 서울과 여수에서 열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해외 석학 초청 강연의 일환으로 방한했다. ‘인류학과 문화의 정치’라는 주제로 연세대와 여수 엑스포에서 3차례 강연을 실시했다. 허츠펠드 교수는 캠브리지대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으로 1969년에 학사를 했고, 버밍험에서 현대 그리스 연구로 1972년에 석사, 1989년에 박사를 했으며, 옥스포드에서 사회 인류학으로 1976년에 박사를 했다. 인디애나 대학 등을 거쳐 1991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인류학 및 민속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 당신은 인류학을 통해 기성의 정치 관념과 문화에 도전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사회과학으로서 기존의 정치학 패러다임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가 아닐까 한다. 당신이 바라보는 기존 정치학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말해 달라.

“정치학과 인류학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정치학자들은 국가, 국제기구의 권력행사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많은 정치학자들은 일반인들의 정치적 역할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예로 선거 행태를 연구하면서, 설문지 조사에 의거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종종 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숫자에만 연연하는 학자들은 그 뒤의 사람을 무시합니다. 정치학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문화에 관심을 가져도 문화를 과정으로만 보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헌팅턴처럼 피상적 이론에서 말하는 몇 개의 그룹으로 문화를 설명합니다. 이는 위험한 스테레오 타입을 학문적으로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문화 폄하론자들입니다. 이들은 합리성의 보편성을 주장합니다. 두 그룹 다 문제가 있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정치학자는 타분야의 학자와 대화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물론 인류학자가 모든 답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 당신은 서구 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바로 그 서구 중심주의에 저항하면서 태동한 아이사의 탈 서구주의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한다. 어떤 맥락인가.

“권력이 행사되는 과정은 권력을 행사 받는 자에게 비슷한 과정을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보면, 팔레스타인 측이 시오니즘과 비슷한 전략을 점점 구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죠. 누가 잘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구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아시아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에는 수긍합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이 서구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시아적 담론은 서구의 것과 닮아있습니다. 서구적 가치와 아시아적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고정 관념이고, 분석적이며 창조적인 사고를 방해합니다. 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선 수긍하지만, 매우 비판적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비판적 관점을 담은 미디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 냉전이 종식된 지 오래됐지만, 세계는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대 태러 전쟁을 둘러싼 미국과 이슬람의 갈등,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내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 운동과 그에 대한 탄압, 반 세계화 운동 등 하루라도 잠잠할 날이 없다. 이는 좀 더 확장된 다원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인지, 아니면 확고한 정치적, 경제적 구심이 없어서 생긴 일인지, 견해를 듣고 싶다.

“세계의 여러 집단이 더 갈등하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보다는 예전에는 정보에 어두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므로, 여러 갈등을 더 인식하는 수단을 갖게 됐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분쟁의 규모와 복합성이라는 두 가지 변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문, 가족 보복, 촌락 안의 갈등 등은 작다고 하더라도 덜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분쟁은 복합적인 것이죠. 예를 들어 보스니아 분쟁 시, 세르비아 군대는 보스니아 여인들을 강간하고,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아이를 임신시켰습니다. 자기의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막는 수단이자, 부계 혈통에 따라 그 아이들이 세르비아인이 되게 하는 수단이죠. 이는 갈등을 나름의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정치, 경제학자는 이런 사실들을 무시합니다. 인류학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죠. 일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합니다.
 냉전 시 지도자들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나 현실의 복합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합니다. 인류학적 연구가 여러 지역 이해에서 내부 시각을 활용해 세계의 이해에 기여하리라는 점을 기대합니다. 사실 인류학자는 불편한 진실을 알아내곤 합니다. 언론 역시 대중에게 사회 현상에는 복합적 요소가 있다는 점을 알려할 의무가 있죠. 동과 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이슬람, 이런 고정관념과 이분법으로 복잡한 세상을 단순화하는 것은 결국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익만 강화할 뿐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미디어를 대중을 바보 취급하는 공범자들입니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해야 하는 현실은 이해하지만, 책임있는 행동은 아니죠. 사회의 복합성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현실의 복합성을 알리는 일에 대해선 인류학자나 미디어가 함께 가야합니다.”

△당신은 피상적으로 공동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사회들이 사실은 다양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정치적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입장인가. 만일 정치적 다원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독재나 여성억압, 기타 반인권적 태도로 일관하는 정치 체제도 인정해야 하는가. 민주주의 혹은 인권의 보편성은 다원주의가 만개할 세상에서도 견지돼야 할 가치인지 궁금하다.

“상대주의는 좋은 생각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난민의 아들이고, 정치체제가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 보호 명목으로 잔인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경우를 잘 알고 있죠. 쉬운 답은 없겠지만,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되돌아보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는 상대주의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과격한 절대주의와 비슷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독재를 정당화하는 권력이 민중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있죠. 큰 정치적 모순입니다. 또 매우 우익적인 정당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면, 이런 시스템에는 저항해야죠. 상대주의와 절대/보편주의 사이의 상호 논박에 빠진 것은 개인주의와 집합주의에 대한 윤리적 문제입니다. 학문적 분석에서 중시하는 것은 한 지역 사회에서 사람들이 책임을 어떻게 인식하고 권력을 행사하는지, 그 양상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논쟁에 빠진 부분이죠. 사회의 문화적 복합성에 대해 정면으로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대주의가 절대적인 독트린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상대주의적이 아닙니다. 책임은 종이 위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죠. 제가 주장하는 바는, 매우 복합적 진실의 보편성을 인저아고, 생산적 불편성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폐쇄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안다고 자인한다면, 그것은 잘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은 현실주의적인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지식은 불확실성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해야 지식이 발전하죠.”

△당신은 서구 문명의 중추인 기독교에서 오늘날 국가 관료제의 부패 개념을 도출해낸 바 있다. 관료제의 부패를 막기 위한 인류학적 제언을 듣고 싶다.

“부패라고 일컫는 것은 역사, 문화적 사건입니다. 부패에 대한 대안이 더 나으리라고 할 수는 없죠. 부패라는 사상의 기원, 우리는 천국에서 추방된 유한한 생명체이고, 그래서 부패한다는 기독교적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서구 전통에선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지, 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선 동일합니다. 이로 인한 원죄의식은 종교만이 아니라 법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 영향이 발견됩니다. 사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부패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기술적으로 그것을 숨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부패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제안드리는 것은, 부패 현상의 분석을 동정의 마음에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동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부 유럽 지방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는 지도자-추종자 모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죠. 교화나 성당이 전체주의 정권과 큰 갈등이 없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교회가 권위 복종에 편했다는 뜻이죠. 사람들이 기도하고, 고백하고, 회개하고, 이를 성직자가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실 효과적인 체계적 저항을 꾀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성직자 등이 정치 체제에 저항하는 경우도 있죠. 남미 해방 신학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체적으로 예외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권력 구조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부패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폭력에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도 있습니다. 구조적 폭력의 가장 나쁜 예는 일상 안에 그것이 숨겨진 경우죠. 예를 들어 누군가 잘 웃고, 우정을 강조하고, 공손할 경우, 우리는 그가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에 대해서 비판을 해야 하지만, 반부패 수사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야합니다. 때로 정치가가 도덕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연막작전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이런 사회현상을 공적 담론의 장에 널리 알리고,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부패에 대한 정치 수사가 그 문화권의 고정관념들을 이용해 어떤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 오늘날 자본주의는 모든 세계를 단일한 시장 중심 체제로 묶고 있으며, 프리드먼의 말처럼 평평한 세계로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프리드먼의 사고방식은 굉장히 오만하고 무지한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자가 대중을 무시하고, 사회적 복합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식의 담론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식의 담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예언적 현실화 작용도 합니다. 많은 책과 논문이 세상의 동질화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여러 사회들의 내부적 차이와 복합성을 보이는 것이 더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 예로 저는 한국의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맥도널드가, 그 외양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이 하나의 지역적 색채만을 지니고 있다고, 이는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성은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이란 습관과 발명 사이의 긴장에 대한 것입니다. 동일성과 차이의 긴장에 관한 것이자, 구조와 행위 사이의 긴장이라고 할 수도 있죠. 따라서 이러한 긴장을 상실하면, 인간 존재의 흥미로운 점이 사라집니다.”

△ 인류학에 내재된 식민주의, 식민성의 문제에 대해서 한 말씀해달라.

“사실 우리 인류학자는 과거 역사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제국주의였던 영국에서 인류학이 태동한 점도 그렇고요. 저는 서구 문명의 자궁이라 자임하는 그리스에서 몇 년 살았고,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인류학은 그러한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한 권력 비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제국주의적 권력을 비판해도, 제국주의적 사고의 잔여물은 인정해야겠죠. 만일 과거의 역사로부터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이는 각종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말처럼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류학자의 원죄는 인류학이 식민지적 팽창에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곧 내가 말하는 것이 과거사에 의해 얼룩져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善人(good person)이라는 것은 성자적 진공 상태에 사는 사람이 아니죠. 그보다는 권력의 남용에 맞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학을 탈식민화시키는 방법은 과거를 단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또 직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류학자가 자신을 식민주의적 짐에서, 그야말로 식민주의 신화를 영구화시키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원죄라는 수사를 사용한다면, 지식은 원죄라는 수사에서 그 결과로 인간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학문적 연구에서, 그 수사를 넘어 연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지식은 완전해질 수가 없죠. 알려고 하는 몸부림 속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학 이론은 권력이 복합적 현실을 단순화해 대중에게 전할 때, 거기에 저항해야할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은 복잡하고도 지저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점이 인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죠.”

진행 정리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통역 한승미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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