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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회학자의 시선] 천편일률적인 담론 … 기술의 약속보다 감시와 통찰 더 중요
[과학사회학자의 시선] 천편일률적인 담론 … 기술의 약속보다 감시와 통찰 더 중요
  • 교수신문
  • 승인 2009.05.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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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관심사이거나, 슬로건이거나, 사후 설명 방식이 될 수 있을 뿐, 분과학문이 되기 어려운 범주가 있다는 건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가령, ‘욕망의 문화사’라는 이름이 붙은 ‘새로운’ 학문적 조류가 생겨났다고 합시다. 그것은 문화와 욕망의 관계, 혹은 인간 욕망을 키워드로 놓고 문화사를 설명하려는 시도겠지만, 연구자의 능력에 따라 대단히 흥미롭고 유익한 저서가 나올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하나의 학문 분과가 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 ‘몸의 사회학’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온 것도 이와 유사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역시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개별 연구자의 취향 및 능력이 함께 하는 연구 프로젝트일 뿐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미나’도 할 수 있고, 몇 몇 대학에서 ‘연구소’를 설치할 수도 있긴 합니다.

 
‘생체모방공학’은 앞서 예를 든 것들과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문제도 가집니다. 개념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개별 연구 수준으로나 들어가야 의미가 명확해질 수 있다는 점은 여기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거기에다 개념(bios와 mimesis)의 포괄성과 지향성이 공학(engineering)을 한정하고 지시한다는 점에서, 모호함과 제한성이 결합하고 있는 데서 오는 언어적 문제는 좀 더 도드라집니다. 한국어가 주는 어감은 거기다 분과학문적인 냄새까지 풍기게 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주의(ism)’라고 할 만한 특성도 갖습니다. 예술에 비유한다면 ‘리얼리즘’처럼, 그 범주의 경계는 대단히 멀리,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것입니다. 나름의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작품들의 리얼리즘을 논하는 평론가도 있을 수 있겠지만, ‘리얼리즘學’이라고 부르진 않겠지요. ‘리얼리즘연구소’가 만들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뭔가를 포착하게 됩니다. 즉, 생체모방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문학작품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라는 점, 평론가들이 리얼리즘 문학 작품이라고 말을 할 뿐 창작자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쓴 작품이 많듯이 생체모방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도 그럴 것이라는 점, 현장 개별 연구가들이 ‘생체모방’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든 적이 없었다는 것, 리얼리즘 문예이론이 작가가 아닌 평론가들의 것에 가까웠던 것처럼 생체모방 역시 현장 연구가의 것이라기보다 연구史와 비평의 영역에 훨씬 친화성이 클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재닌 베니어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 생체모방이라는 개념을 알린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체모방과 관련한 담론은 놀라울 만큼 천편일률입니다. 상어 피부를 모방한 수영복, 도마뱀붙이의 발바닥을 모방한 접착제, 도꼬마리 열매가 옷에 잘 붙는 성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벨크로 테이프,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연꽃잎 표면 구조에서 착안한 페인트, 혹은 거미줄을 모방한 섬유개발이나 물고기의 형태를 본 떴다는 전동차의 유선형 등등을 나열하지요. 사례를 드는 것이 대개 똑같습니다. 다빈치와 비행기의 예처럼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없던 것을 만들고자 할 때, 이미 있는 것을 관찰해서 아이디어를 얻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이지요. ‘자연’은 ‘이미 있는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그동안 만들어온 수많은 것들이 자연 속에서 많든 적든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체모방이라는 단어 위에 찍힌 새삼스러운 강조점을 보고 있는 것이거나, 익숙한 단어에 따옴표가 있는 상황을 맞이한 셈입니다. 생체모방 뒤에 ‘공학’이 붙는다고 해서, 그것이 크게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공학이라는 개념 자체의 광범위를 인식한다면 그렇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모사기술’을 얘기합니다. 무생물까지 포함하겠다는 뜻이지요. 우스꽝스럽게도 이 표현까지 나아가면, 조형예술의 상당부분까지 포함하게 될 것이고, 논의는 플라톤의 모방론으로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드러나는 모방의 층위만 해도 이렇듯 다채롭습니다. 이렇듯 풍부하고 다채로운 까닭에 ‘모방’이라는 하나의 언명으로 이들을 묶을 수 없고, 부지불식간에 이뤄지는 것을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으며, 하나의 연구프로젝트로 취급받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과학기술학'의 하위분과가 될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별 연구자 입장을 떠나서 그러한 각종 작업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는 있으니까요. 나름의 방법론을 동원하고 강조점을 두면서 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체모방의 약속은 허구


생체모방공학은 그 자체로 친환경적이라거나 인류의 복지를 약속한다는 얘기는 허구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가령, 생체모방공학의 응용 사례로 흔히 자랑하는 것으로서, 곤충의 몸속에 MEMS를 이식한 풍뎅이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체를 모방한 기술은 시장에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동시에 인류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기술의 ‘약속’이 아닌, 끊임없는 감시와 통찰입니다. 

이충웅 고려대 강사·과학사회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과학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등의 저서와 『고통과의 화해』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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