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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자존심을 위한 혁신
[學而思] 자존심을 위한 혁신
  • 전인수 홍익대·경영학
  • 승인 2009.05.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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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자 한 일간 신문 1면 기사의 제목과 내용이다. “교수님도 괴롭다”는 제하에 서울대 정교수 승진비율이72.6%(2006), 63.9%(2007), 53.8%(2008), 45.9%(2009/1학기)로 점차 낮아지고 있음을 도표로 예시하고 있다. 또한 “교수의 생산성을 높여라”, “교수인력시장이 열린다” 등이 소제목을 장식하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사회는 ‘철밥통’ 운운하면서 남의 밥그릇에 간섭하는 못된 버릇이 생겼고 보수언론이 이를 주도해왔다. 정부나 학교당국 또한 당근과 채찍으로 몰아세우기는 보수언론에 못지않다. 가끔은 기업의 CEO까지 나서서 우리 대학교육의 질이 낮아 재교육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고 대학과 대학교수를 몰아세운다. 

대학교수에 대한 시비로 부족한지  어떤 방송국에서는 ‘부자 대학 가난한 대학생’이란 프로그램으로 잉여금을 축적하면서 등록금을 올리는 대학당국에 또 다른 시비를 건다. 투자 없이 성과 없다는 것을 기업이나 정부나 언론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등록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대학을 표적으로 화살을 꽂고 있다.

인문학이 경영에 도움 된다고 해 인문대학에 CEO과정을 개설하고, 보수신문에서 걸핏하면 인문학을 도와주는 것처럼 文史哲이 경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매우 못마땅하다. 이제는 하다하다 해볼 것이 없으니 돈 벌이에 인문학까지 동원하는 짓까지, 거기에다 인문학 전공교수들까지 무슨 새로운 시장이나 발견한 것처럼 떠드는 것은 더욱 못마땅하다. 인문학은 시장의 경쟁에 찌들린 사람들에게 그나마 작은 위안과 자유를 주는 것이지 장사하는데 동원할 경영지식은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만 경영은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애당초 같은 반열에 있을 수 없다. 

언론, 정부관리, 기업의 CEO가 대학교수와 대학을 흔드는 것은 슬프지만, 소주 한잔이면 소인배들의 몰상식으로 치부할 수 있어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정작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인문학의 예처럼 학문의 어설픈 시장화를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출구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다. 시장메카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지식의 창조, 소통, 제공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되는 지식시장은 인정한다. 못마땅한 것은 정작 창조에 소원하면서 소통과 제공에 정신 쏟고 있는 유통업자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창조가 소통이나 제공보다 반드시 나은 활동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학자가 창조에 몰입하지 않으면 보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지식의 수입 및 유통은 학자들보다 사회가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기왕 노출된 시장이라면 어설픈 시장화가 아니라 확실한 시장화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할분담이 필요하다. 모든 교수가 시장논리에 고통당하고 신음하지는 않을 수 있다. 눈 침침하고 허리 아프지만 정교수는 좀 낫다. 보수언론의 몰상식, 관료들의 전지전능함이 싫지만 마땅히 우리는 저들을 훈도할 권위나 수단이 없다. 어렵겠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은 우리학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의 자존심을 위해 남은 정신과 능력을 쏟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50% 이상을 차지하는 정교수들의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유지적 혁신과 와해적 혁신으로 나눌 수 있다. 기존의 것에 작은 특장점을 하나씩 추가하는 것이 유지적 혁신이라면, 와해적 혁신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얕잡아 보고 덤비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창조능력의 부재라고 본다. 차제에 나를 돌아보고 나의 학문하는 방법론과 콘텐츠를 다시 점검하는 것이 와해적 혁신의 출발이다.

우리 정교수들이 와해적 혁신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사회나 우리 후학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소외된 자와 같이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랜 내공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경험을 존중하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것이다. 후발개도국의 맏형으로 선진국의 막내로 턱걸이 하면서 겪는 우리의 경험은 지식창조의 보고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언론, 정부, CEO도 아니다. 바로 이 땅의 학자로서 내 역할을 못하는 나 자신이다.

전인수 홍익대·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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