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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매화가 피는 계절
[원로칼럼] 매화가 피는 계절
  • 교수신문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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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매화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하여 ‘雪中梅’라 부르기도 하며, 매, 난, 국, 죽 四君子 가운데 철이 먼저라 하여 ‘第一君子’로 높여 부르기도 한다.

옛날 선비들은 눈 속에서도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매화를 통해 군자의 늠름한 기상을 배우고, 또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뭇 꽃들과 섞이지 않고 한 발 앞서 피는 매화의 생태에서 군자의 孤高한 덕성을 유추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매화를 읊은 시를 많이 남겼고 문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으로 매화를 墨畵로 치기도 했다. 이따금 선인들이 남긴 시나 그림을 섭렵하고 그 정취를 음미하는 일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후 조금은 한가해진 나의 생활의 여가를 즐기는 방편이 되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선비 林逋는 항주 서호가의 孤山에서 평생을 매화를 가꾸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하여 ‘梅妻鶴子’의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가 매화를 읊은 시 가운데 “맑은 물 시냇가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꼈고, 황혼녘 달빛 아래 그윽히 향기 넘실거리네(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고 한 구절은 절창으로 인구에 회자된다.

눈 속에서 피어난 매화를 읊은 시로는 당 張謂의 ‘早梅’를 으뜸으로 친다. “한매 한 그루 백옥같은 가지/시골 길다리 가에 저만치 서 있네/물이 가까워 꽃이 먼저 핀 줄 모르고/겨울이 지났는데도 눈이 아직 녹지 않았나 했더라네(一樹寒梅白玉條, 향臨村路傍溪橋, 不知近水花先發, 疑是經冬雪未銷)” 이 시의 마지막 구는 당 李白이 뜨락에 비친 밝은 달빛을 보고 서리가 내린 줄 알았다고 한 싯귀를 연상케 한다.

송 王安石은 매화에서 번져 오는 향기가 있어 비로소 그것이 눈이 아닌 것을 알았노라고 ‘詠梅’에서 후각기능을 살려 매화의 자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담장 모서리 매화 몇 가지/추위를 이기고 홀로 피었네/멀리에서도 그것이 눈 아님을 알겠나니/그윽히 번져오는 향기 있음에(墻角數枝梅, 凌寒獨自開, 遙知不是雪, 爲有暗香來)”송 盧梅坡는 그의 ‘雪梅’에서 매화와 눈과 시 세 가지를 유기적으로 합성하여 봄의 정취를 묘사하고 있다. “매화 있고 눈이 없으면 산뜻하지 못하고/눈 있고 시 없으면 사람 속되게 하네/해질 녘 시 이루고 또 눈까지 오니/매화와 어우러져 얼씨구 봄이로다(有詩無雪不精神, 有雪無詩俗了人, 日暮詩成天又雪, 與梅幷作十分春)”

송 陸遊는 매화와 벗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세속에 찌든 자기의 몰골이 아무래도 매화의 짝이 못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매화에게 避俗精進할 것을 다짐한다. ‘梅’ “매화와 벗하고 싶은데/내 꼴이 아무래도 너만 못할 것 같구나/이제부터는 불로 해 먹는 음식 딱 끊고/약수 마시고 신선 책이나 읽으리라(欲與梅爲友, 常憂不稱渠, 從今斷火食, 飮水讀仙書)”

나도 매화가 좋아 철이 되면 남쪽으로 探梅 여행을 떠나고, 매실이 영글면 이를 얻어다가 술도 담그고 장아찌도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산성마을 우리 집 뜰에 매화나무 몇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火食을 끊지 못하고 있으니 매화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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