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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독일어로는 따라갈 수 없었던 마키아벨리의 ‘알레그리시모’ 문체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독일어로는 따라갈 수 없었던 마키아벨리의 ‘알레그리시모’ 문체
  •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 강사·노문학
  • 승인 2009.04.27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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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론은 번역이란 무엇이며, 어떤 번역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성찰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번역이론의 번역은 그 이론의 간접적인 전달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제시 아닐까. 즉, 번역이론의 번역은 번역에 대한 성찰의 실천이자 견본이다. 그것은 자기 언급적 발화와 닮은꼴이면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시간차가 제거된 독특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흥미를 끄는 책이 드라이든에서 데리다까지의 번역론을 모아놓은 『번역이론』(동인, 2009)이다.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업’처럼 국내에 여러 차례 소개된 글도 실려 있지만(대개 ‘번역가의 과제’라고 번역됐다) 대부분은 처음 소개되는 글들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영어로 옮긴 나보코프의 번역담(‘번역의 난관’)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제일 처음 읽은 건 니체의 ‘번역의 문제점에 관해’이다. 니체가 따로 번역에 대한 글을 쓴 건 아니고, 『즐거운 학문』과 『선악의 저편』에서 한 대목씩 발췌한 것이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역사적 감각 수준은 그 시대에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과거와 과거의 책들을 어떻게 그 시대의 것으로 융합하고자 하는지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선악의 저편』에서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고 주장한다. 이 속도에 관한 니체의 성찰을 잠시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문체의 속도가 종족의 성격,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속도에 근거한다고 보는 니체는 독일어의 경우 ‘빠른 템포(presto)’를 거의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유감스러워한다. 독일인들은 장중하고, 엄숙하고 둔중한 모든 것, 느리고 지루한 온갖 종류의 문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달시켰지만, 부포(buffo)나 사티로스(satyr)는 그들의 감각에 잘 맞지 않고 낯설다는 것이다. 즉, 익살스러우며 해학적인 세계는 그들에게 이질적이며, 따라서 독일어로는 아리스토파네스나 페트로니우스를 번역하기가 힘들다는 게 니체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니체는 『군주론』에서 피렌체의 건조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게끔 해주면서도 가장 진지한 내용을 ‘아주 빠르게(allegrissimo)’ 표현한 마키아벨리의 속도를 독일어로는 따라갈 수 없다고 아쉬워한다. ‘매우 빠른(presto)’ 속도의 진정한 장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를 감히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한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고대 그리스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리스토파네스는 또 어떤가.

니체는 다행스럽게도 전해져온, 플라톤에 관한 ‘petit fait’를 언급하는데, 불어 표현을 쓴 이 대목을 책세상판 전집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보존돼온 소품(petit fait)”이라고 옮겼고, 『번역이론』에서는 “운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petit fait(작은 일)”이라고 옮겼다. 내용인즉 플라톤이 임종한 침상의 베개 밑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가리키므로 ‘사소한 사실’ 정도의 뜻이겠다. 그렇다, 플라톤이 임종에 이르러서 가장 가까이에 두었던 책이 『성서』도 아니고, 이집트의 책도 아니고, 피타고라스도 아닌, 그렇다고 플라톤 자신의 책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였다는 것. 이것이 플라톤의 비밀을 알려주는 건 아닐까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아니었다면 플라톤은 자신이 부정했던 그리스적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여기까지 읽게 되면 우리도 아리스토파네스나 페트로니우스를 머리맡에 두고 싶지 않은지. 부정하고픈 삶이 어디 그리스적 삶뿐이겠는가.

다행스러운 건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집이 한국어로도 번역돼 있다는 점. 게다가 한국인 ‘신진대사’의 평균속도는 어느 종족보다도 빠를 것이니 니체도 부러워한 이 속도의 장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익살과 해학은 또 우리의 장기가 아닌가. 그런 즐거움마저 없다면 한국적 삶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 강사·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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