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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돈 안되는 학문의 역설
[학이사] 돈 안되는 학문의 역설
  • 배석원 경상대 철학
  • 승인 2009.04.13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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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몸과 정신의 결합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효용성을 논할 때 물질적인 것에 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질적인 것은 우리 몸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나 정신의 필요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다. 밥만으로 정신을 살찌게 할 방법이 없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정신의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몸만 튼튼하고 정신이 빈약하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정신의 양식은 인문학, 특히 철학에서 제공받아야 한다.

과학을 몰라도 누구나 과학의 산물을 이용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 철학은 과학기술처럼 눈에 보이는 효용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철학을 무용한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철학이 밥을 먹여주느냐고 불평하기도 한다. 밥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철학이 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밥을 해결한 후에도 여전히 밥 타령만 하고 있다면 그가 온전한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철학의 효용가치는 오로지 직접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우리가 철학의 가치를 향유하려면 직접 철학하기에 참여하는 길 밖에 없다. 동료교수들은 ‘철학은 좋은 학문이야!’하며 립서비스를 즐기면서도 스스로 철학하기에 나서지도 않고 또 제자들에게 철학을 공부하도록 권장하지도 않는 것 같다. “철학은 미신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등불입니다” 라는 동양철학관을 안내하는 문구가 철학을 곡해하기 때문인가.

인간의 모든 품위는 사고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자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철학하기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중요한 점에서 자기변화를 느끼게 된다. 이 점에서 철학하기에 참여하는 것은 전투에 참여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철학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피교육생들이 지적 독립성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와, 그들의 신념이나 가치, 사고방법이나 일반적인 태도가 바뀌고, 그로 인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지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 노예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정신적으로 예속된 삶을 사는 사람은 그가 예속돼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조종당하게 된다. 철학하기는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누구나 철학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며, 철학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높아지고, 동시에 자기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철학하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논증의 건전성을 문제로 삼는다. 곧 진술의 참·거짓을 확인하고 전제가 결론을 뒷받침하는지 그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철학하기에 익숙해지면 권위나 완력이 아니라 논증에 의해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철학의 정신이 망각돼서는 안 된다. 철학하기는 주입식 교육의 폐단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시에 참된 지식을 탐구하고 나아가 삶의 지혜를 추구하게 한다.

유네스코는 2002년부터 매년 11월 20일을 ‘철학의 날’로 정하고, 전 세계적으로 철학교육을 강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제도화돼 있지만 실제로 가르치는 학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생조차 철학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한때는 교양필수로 누구나 ‘철학’을 이수했으나 30년 가까이 선택교과로 운영되고 수많은 교양과목이 동시에 개설되면서 수강생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학부제 도입 10여년에 설상가상으로 졸업 이수학점이 10학점이나 하향조정 되면서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교과목이 됐다. 최근 PSAT. MEET, LEET 등 각종 시험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비판적 사고’ 를 훈련하는 교과목이 일부 대학에서 개설되고 있으나 이것이 철학교육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정부가 주창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앞세운 ‘경쟁력 강화’라는 기치 때문에 철학이 ‘돈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 오인되면서 철학과의 존립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대학을 직업준비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취업률을 학과 평가의 잣대로 삼으면서 철학을 기피하는 경향을 심화시키고 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직업인이 되면 어느 분야에서나 두각을 나타낼 수 있고, 전문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학부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하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철학 교육이 사라지면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갖춘 젊은이를 양성할 수 없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큰 가치를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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