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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애서가를 섭섭하게 만드는 책의 현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애서가를 섭섭하게 만드는 책의 현실
  •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영문학
  • 승인 2009.03.1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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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한때 책은 장원 하나 값에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 이렇게 책을 귀하게 여긴 태도는 기독교 신앙에서 연유한 것이다. 세상을 신이 선물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중세인의 마음이 책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책을 읽는 행위가 ‘좋은 일’이라는 걸 은연중에 ‘주입’당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책 읽기를 시작하고 책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책에 대한 관념은 편견의 지배를 받는 셈이다.

나의 할머니는 어린 시절에 언문을 깨친 분이셨는데 당신의 손자와 함께 늦도록 같이 책을 읽는 걸 즐기셨다. 독특하게도 할머니는 ‘묵독’을 하실 줄 몰랐는데, 모든 책을 창가 풍으로 운율을 붙여서 읽으셨다. 나중에야 나는 독서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다가 중세까지 책 읽기라는 건 ‘낭송’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할머니의 독서법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책에 대한 경외심은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중세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책은 신의 진리를 담고 있는 비밀스러운 물건이라기보다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 바뀌었다. 보들레르가 개탄한 ‘시’의 타락은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활자에 사로잡힌 시의 운명은 곧 상품이라는 틀에 갇힌 예술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얼마 전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빅뱅이라는 십대 아이돌 그룹이 지었다는 자서전을 보았다. 『세상에 너를 소리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엄연히 말하면 고스트라이터가 쓴 ‘대필작품’이었다. 물론 과거와 달리 이 책은 ‘대필자’의 이름을 당당하게 빅뱅 옆에 박아놓고 있다. 지은이는 빅뱅이고 이를 정리했다는 이름을 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필작품이었지만 이 책은 당당히 ‘전기문학’부문 베스트셀러에 랭크돼 있었다.
한때 『마시멜로 이야기』나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대필논란에 휩싸였던 걸 감안한다면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작은 차이는 대필작가의 이름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방식에 있다. 옳고 그른 문제를 떠나서 본다면, 한국에서 대필논란이라는 게 결국은 책의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오히려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속임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인기그룹 빅뱅의 전기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제 책은 과거의 아우라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김훈 정도나 아마 장인정신에 충실한 마지막 ‘문장가’로 인준 받지 않을까. 이제 책의 독창성이라는 말은 박물관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맥락 없는 말이 돼다. 이런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고 책의 죽음을 선언할 성미 급한 이들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만한 현실적 대안이 없는 한 이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솔직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야만과 싸워 이룬 문명의 기념비라는 벤야민의 말을 되새겨보는 것도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고리키의 말처럼,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말도 벤야민의 말을 변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은 분명 의미심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책이 신앙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미국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만든 킨들이라는 전자책 전용기기가 암시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소장의 의미를 상실한 책. 오직 정보를 담은 매체로만 기능하는 책. 애서가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현실은 이렇다.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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