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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다카시와 지오반니 아리기를 번역하면서
오카모토 다카시와 지오반니 아리기를 번역하면서
  • 강진아 서평위원 / 경북대·동양사
  • 승인 2009.03.0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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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최근 책 두 권의 초벌 번역을 끝냈다. 한 권은 일본인 학자 오카모토 다카시의 『세계 속의 한, 중, 일 관계사』이고, 다른 한 권은 지오반니 아리기의 2007년작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이다. 얼떨결에 두 권의 번역을 함께 진행하게 됐는데, 작업은 힘들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두 책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책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아주 다른 대접을 받을 것 같아 벌써부터 두렵다.

오카모토 다카시의 책은 직접 번역을 자원한 경우였다. 이 책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거시적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의 변동을 논했는데, 주로는 개항에서 청일전쟁까지 조선을 무대로 청, 일의 패권 교체에 집중하고 있다. 대중서로 치밀한 사료 분석은 생략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골자만 썼다. 문제는 이 책의 시각인데, 현상적으로 보면 20세기 전후 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 정부와 지식계의 시각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이 책이 그리는 조공국과 독립국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조선 정부의 모습이나 청일 및 구미열강의 전략과 경쟁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의 ‘자주적인’ 역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중국의 중화질서에 도전하는 동아시아의 이단적 혁신세력으로 나타나며, 근대 이후의 堀起는 준비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번역 내내 착잡했고 불쾌했다. 미래의 독자들도 상당히 불쾌할 것이다.
지오반니 아리기의 책은 억지춘향이로 번역을 떠맡은 경우였다.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책이었긴 하지만,  영어 실력도 짧고 저자의 관점에는 다소 비판적이기 때문이었다. 헤게모니 전환의 전형적 특징인 세계적 금융위기가 닥칠 것이고, 장기 20세기의 미국 헤게모니가 끝나고 21세기의 세계 헤게모니는 중국과 동아시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책이 출판된 이듬해, 그리고 여름방학동안 번역을 절반가량 끝냈을 때, 정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기도 했다. 사실상 중국에 강하게 방점이 찍히기는 하지만, 동아시아로 뭉뚱그려 한국 역시 ‘떠오르는 별’로 그려진다.

미래의 독자들도 상당히 뿌듯할 것이다.
두 책은 전혀 다른 주제인 것 같지만,사실은 비슷하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을 주장하는 아리기의 책은 근 이십 년간 일본학자들이 치밀하게 구축해 온 중일 양극의(bi-polar) 동아시아시스템을 빈번히 인용하고 사실상 실증 연구는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오카모토의 책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아리기의 시선이 현재 미국의 정치사회학자들의 최대의 관심사를 반영하듯이 ‘그럼에도’ 중국에 집중돼 있고 동아시아 내에 중국과 일본을 모순 없이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오카모토의 책은 양자가

대항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부상하는 ‘동아시아’ 속에 사뿐히 모순 없이 포함되는 아리기의 책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받아들일 만한 것일지 몰라도, 조선이 중일의 ‘대극구도’ 속에 무력한 존재로 그려지는 오카모토의 책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강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오카모토의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시각이 100년 전의 제국주의자의 시선과 수사적으로 비슷할지는 몰라도 21세기 한반도 정세를 보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관점이 현재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한국인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일본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시각이 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시각과 다르기 때문일 뿐이다. 그 시각의 차를 소개하고 싶었다. 아리기의 책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이지만,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서구중심주의자로 자주 인용되는 데이비드 랜디스(David Landes)의 책을 번역하고 싶다. 미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시각은 바로 랜디스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강진아 서평위원 / 경북대·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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