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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낙관주의자의 현실성 있는 제안
유쾌한 낙관주의자의 현실성 있는 제안
  • 양효실 서울대 강사·미학
  • 승인 2009.03.02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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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슴』낸시 폴브레 지음┃윤자영 옮김│또하나의문화│2008│360쪽

『보이지 않는 가슴』낸시 폴브레 지음┃윤자영 옮김│또하나의문화│2008│360쪽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압축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의존하고 있다. 사랑·의무·호혜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틀 밖에서 시장은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가사 경제가 지금까지 무시돼왔다는 지적은 여러 번 있었다. 이 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 특유의 돌봄 경제가 수요 공급의 냉혹한 법칙의 시선에 포착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 돌봄 특유의 가치와 기능이 있으며, 그것은 경쟁 사회가 결코 확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고답적이고 끝이 나지 않는 논쟁을 벗어나 “돌봄을 조직하고
보상하는 제도”를 대안적 체제와 함께 고민하자고 저자는 말한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자신을 ‘인간이 서로를 돌보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라고 소개한 낸시 폴브레는 개인주의적 성취와 경쟁만이 인정받고 숭배되는 현대 경제의 상황에서 사랑, 의무, 호혜와 같은 돌봄의 가치, 혹은 ‘가족 가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에 이 책을 썼다.

돈에 대한 의도가 아닌 타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노동으로서의 돌봄 노동은 당연히 주류 경제학의 주제가 아니다. 주류 경제학은 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즉 경쟁 시장에 존재하는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지해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작은 정부라는 경제학의 이념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폴브레가 보기에 애덤 스미스가 개인의 이기심에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때 전제가 됐던 이타심이나 자비로움 같은 도덕 감정이 현 상황에서는 약화 내지 소멸될 위기에 있고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무한질주를 상쇄할 다른 원리가 필요한 바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가슴’이다.

그런데 사랑, 의무, 호혜와 같은 가족 가치는 가부장적인 권력이 약화된 현 시점에서, 전적으로 여성들의 희생에 의지할 문제가 아닌 ‘가족’으로서의 국가가 나서서 보존할 문제가 됐다. 지금껏 비시장적인 가치들, 즉 환자, 노인, 아이들의 양육과 돌봄을 전담한 것은 집안의 천사란 은유에 갇혔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교육, 경제적 능력의 확장은 결혼 대신에 남성의 공간으로서의 공적인 영역에서 동등한 존재로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여성에게만 배타적으로 강요됐던 이타심(모성성)을 버린 여성을 비난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가부장적인 욕망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폴브레는 자유주의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해방과 평등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개인주의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모성이라는 굴레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적인 돌봄을 전가하고 남성에게는 이기적인 이윤극대화의 책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역시 비판적이다.

따라서 돌봄의 가치가 홀대받고, 경제적 불평등이 세대로 이어지며 재생산되고, 경쟁과 성공, 효율성의 절대화가 평등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가슴과 보이지 않는 손의 균형을 잡는 유일한 방법은 폴브레가 보기에 타인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경제 전반에 녹아 있는 성공을 측정하고 보상하는 방식을 재평가하고 수정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은 비단 부모의 부의 세습과 ‘내’ 아이의 행복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의 안정과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은 아프거나 노인이 돼 타인의 돌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돌봄을 조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공평한 것인가’라는 경제학자 폴브레의 문제의식은 이 책에서 돌봄 노동의 사회적 공유라는 문제가 시장 사회주의, 참여 민주주의라는 다른 두 방향과 함께 움직임으로써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전개된다. 90년대 들어 빈곤층에 대한 복지 예산이 각 분야에서 삭감되거나 철회된 구체적인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폴브레는 작은 정부란 ‘자기네가 가진 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는 부유한 집단의 교활한 지대추구 전략’이라고 일갈한다.

경제 내 무료 돌봄 영역인바 의료, 노인수발, 보육, 교육, 사회복지 등의 영역은 성공을 측정하는 잣대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다. 비경제적인 경제를 배려하는 경제학은 단순히 돈의 증가가 곧 행복이라는 등식의 관성이 아니라 ‘돈을 행복하게 쓰는 데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그녀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옹호하고 누진세가 행복, 평등, 효율을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6년 미국에서 시행된 복지개혁안으로 인해 빈곤 가정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사라진 것을 우려하는 폴브레의 목소리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도 영향력을 가진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교육 여건에 대한 모색은, 국제학교, 특목고, 외고 진학이 곧 부모의 (경제적, 교육적) 자산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에서, 하향평준화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로 정당화된다. 허나 완벽한 평등, 불가능한 평등으로서의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를 통해 모든 학생들에게 돈을 충분히 지출, 그들의 능력과 자질을 온전히 계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그런 정책을 국가가 나서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 불평등에 대한 폴브레의 대안이다.

폴브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장 사회주의의 이야기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든 미국 시민은 성인이 되면 일시불로 8만 달러의 자금을 받게 하고 전체 국가 예산에서 연간 2%의 세율로 거둔 세금으로 그 자금을 충당하자는 제안을 제시한다. 젊은이들에게 자원을 직접 분배, 기업의 주식을 사게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능력과 질에 직접 투자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제안은 유쾌한 낙관주의자의 현실성 있는 제안으로 내 머리 속 깊숙이 각인됐다.

자신의 개인적인 가족사, 초등학교 시절부터의 교육환경, 행동주의자로서 활동했던 실제 경험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세한 고백과 반성은 이 책이 경쟁과 시장 논리에 지친 독자들에게 단지 서너 시간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하는 몽상가의 독백, 혹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추상적인 이론이나 가르치는 관념적인 지식인의 환상으로 읽히지 않게 하는 힘이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하고 시작하기에 경제학에서는 감수성이나 상상력, 윤리와 같은 비합리적인 인간의 능력을 이야기하기 불가능하다고 한탄했던 경제학과 학생에게 이 책을 권할 생각이다.

폴브레가 배려, 희생, 평등을 위해 꼭 ‘가족’의 은유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서 약간 아쉬움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경쟁 이데올로기가 역으로 ‘가족 신화’(경쟁에 지친 남성의 안식처)를 부추기고 둘이 공모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대안이 가족 가치의 은유로 구성된다는 것은 자칫 책 전체의 주장을 희석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럼에도 세계화라는 유토피아 환타지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더 관심이 가 있는 인문학 전공자에게 여성주의 경제학자의 대안적 모색 읽기는 따듯함과 낙관성으로부터 들려야 하는 사유의 결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었다.

양효실 서울대 강사·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확실한 삶』 등의 역서와 「보들레르의 내면일기에 나타나는 고백의 불가능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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