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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北學의 후예들과 교유한 개화사상가, 감춰진 얼굴을 드러내다
[깊이읽기] 北學의 후예들과 교유한 개화사상가, 감춰진 얼굴을 드러내다
  • 정하영 이화여대·국문학
  • 승인 2008.12.31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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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 박규수 연구』김명호 지음│창비│2008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유명한 조선말, 개화기의 정치가이자 개화사상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라면 의당 역사학이나 정치학의 연구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국문학 전공자가 이런 방대한 연구서를 출간한 데 대해 다소 의아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을 읽고 저자의 연구 경력을 살펴보고 나면 이런 의혹은 쉽게 걷히게 된다.

박규수에 대한 저자의 연구는 결코 자신의 전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저자가 박규수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25년이 지났으며, 그 사이에 발표한 관련 논문도 20편을 넘는다. 저자는 한문학을 전공,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연구』를 박사논문으로 제출하면서 그의 손자인 박규수 연구에 뜻을 두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 연암에 관해 발표한 논문들을 정리해 『박지원문학 연구』를 출간했고, 연암의 문집인 『연암집』을 번역 출간하면서 박규수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연암의 학문과 사상이 어떻게 후대에 이어지게 됐는지에 대한 관심이 연암의 손자로서 연암의 사상적, 문학적 계승자인 박규수에게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학문의 전통이 대체로 家學을 통해서 계승되고 발전됐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저자는 정치가, 사상가이전에 박규수의 문학적 재능과 업적에 주목하고, 작품을 폭넓게 검토하고 깊게 분석해 생애와 업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다소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단편적으로 이루어진 기존 연구 성과를 재검토하고 수정·보완해 연구를 심화·발전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환재 박규수 연구』는 ‘박규수의 삶을 통해 19세기를 다시 성찰하려는 시도’에서 쓰인 책이다. 박규수는 근대전환기의 탁월한 정치가이며 사상가이고 동시에 문학자로서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보여준 인물이다. 위로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북학사상을 계승하고, 국내외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으며, 개화운동을 주도한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같은 후진들을 길러냈다. 따라서 당시의 정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제1부 修學期’, ‘제2부 隱遁期’, ‘제3부 철종시대의 개혁적 관료’, ‘제4부 북학을 계승한 진보적 문인 학자’ 등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저자가 박규수의 생애를 수학기, 은둔기, 仕宦期 등으로 구분한 데 따른 것이다.

‘제1부 수학기’에서는 박규수의 家系와 교유관계를 검토하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 있다. 연암의 후예로서 家學을 익히고 당시의 국정을 관장하던 효명세자의 知遇를 입어 개혁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세자의 急逝로 그 꿈이 좌절되는 상황을 살폈다. 이 시기에 쓰인 詩文과 저술들을 통해 박규수의 학문과 사상의 본질을 밝혀내고 있다.

‘제2부 은둔기’에서는 효명세자의 급서와 함께 시작된 그의 은둔생활을 다뤘다.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세자가 떠나고 나서 박규수는 官界의 뜻을 접고 학문과 수양에 힘쓰게 된다. 그는 뜻이 통하는 벗들과 사귀면서 주목할 만한 저술을 통해서 학문적 성숙을 이루어 나갔다. 저자는 이 시기의 주요 저작인 『居家雜服攷』와 『闢衛新編 評語』 등을 통해 박규수의 사상적 성장과 전환과정을 짚어내고 있다.

‘제3부 철종시대의 개혁적 관료’는 환재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환기의 전반부를 중점적으로 조명했다. 이 시기에 환재는 과거에 합격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비록 42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료로서 그의 활동은 의욕적으로 전개됐다. 용강과 부안의 수령으로 나가 백성을 다스렸고, 경상좌도 암행서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도중에 잠시 중국 사신행차에 부사로 참여해 중국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하고 그 곳 문사들을 사귀었으며,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나가 사태수습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제4부 북학을 계승한 진보적 문인 학자’에서는 사환 초기에 이루어진 학술활동과 문예활동을 살피고 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관심 분야였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모습을 새롭게 조명했다. 天文器具인 地勢儀를 제작하는 한편 이를 이론적으로 해명한 『地勢儀銘』을 지어 자신의 과학적 식견을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경세제민, 실사구시의 정신을 피력한 우수한 산문을 지어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고, 금석문이나 서화에 대한 이론을 펼쳐 문인,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환재 박규수 연구』에서 김명호 교수는 박규수의 저작과 활동을 연계해 박규수라는 인물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동시에, 그의 생애와 활동을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는 박규수의 생애를 정확하게 복원하고 이를 재조명함으로써 근대전환기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저자의 저술목적을 실현하는 작업이다.
이 책의 성과와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연구를 통해서 저자는 박규수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의 위상과 역할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피고 있다. 박규수는 근대전환기의 정치사, 사상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저자는 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하고 새로운 연구의 방향과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사적 의의를 가진다.

둘째, 이번 연구에서 저자는 자료 중심의 온당한 연구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인문학 연구는 구체적이고 타당성 있는 자료의 검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기존 박규수 연구는 제한된 자료에 의존해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낸 경우가 없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서 주로 사용한 자료는 김윤식이 편찬한 『환재집』이었다. 거기에는 박규수의 주요 저작들이 많이 빠져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연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료의 발굴과 정밀한 독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박규수의 사상적 연원이 되는 연암의 문집을 완역해 출간한 바 있다.

박규수에 관련된 자료들은 대부분이 난해한 한문으로 돼 있어 한문학 전공자들조차 해독이 쉽지 않았다. 그 중에는 작자의 사상과 감정을 우의적으로 표출한 詩 작품들이 많이 있어 문학적 측면에서 정밀한 해독과 비평이 요구된다.

저자는 이런 어려움을 헤치고 철저한 자료 중심의 실증적 방법을 통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주목받지 못한 많은 자료들을 검토 대상에 포함시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박규수의 인간적 면모와 활동을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 이를 통해 박규수가 북학의 후예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문학 및 과학문명에 대해서도 지식과 소양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셋째, 저자는 이번 연구를 통해서 인문학 연구의 본질에 부합하는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박규수라는 인물이 가진 입체적 성격은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접근만으로는 제대로 밝혀내기가 어렵다.  그 동안 인문학연구는 학제적 연구를 소홀히 하고, 어느 한 분야의 연구만으로 결론에 도달하려는 방법론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가, 사상가로만 알려져 있던 박규수의 문학자적 면모를 새롭게  부각해, 이것이  정치가, 사상가로서의 박규수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박규수 연구의 완성본이 아니라 그 중간보고서의 성격을 띤다. 정작 중요하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그가 고종 이후에 벌인 고위 관료로서의 활동인데, 그것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연구 성과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다음 작업이 마무리되는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규수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든든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충분한 연구사적 의의를 가진다.

저자는 박규수가 남긴 정치, 외교의 평가에 앞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상적 맥락을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또한 지금까지 간과돼 온 그의 교유관계와 문학 활동을 비중있게 다룸으로써 기존 연구의 편향성을 보완했다. 저자는 기존연구에서 간과하거나 소홀히 했던 문제들을 지적하고, 再考를 요하는 문제들을 학계의 논의 과제로 제시해 놓았다. 박규수의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를 1860년대로 본 신용하, 이광린 등의 견해에 대해 이를 그보다 앞선 1840년대의 일로 본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강한 尊明意識을 가졌던 그가 진보적 개화사상의 선각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진주농민항쟁시 안핵사로서 그의 역할의 평가는 정당한가 하는 문제들은 앞으로 학계에서 계속 논의돼야 할 과제이다. 이번에 제기된 문제들이 학계의 관심과 주목을 끌면서 진지한 논의로 이어진다면, 이는 이 책이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가 될 것이다.

정하영 이화여대·국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춘향전의 탐구』 등의 저서와 「검증전의 인물형과 갈등양상」 등의 논문이 있다. 전북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고전문학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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