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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던진 불편한 질문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던진 불편한 질문
  •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교·정치학
  • 승인 2008.12.31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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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 서서 분과학문의 경계를 부수어 가는 인문학 공부를 하는 C의 소개로 일본 메이지시대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고 있다.
거시담론에 골몰하곤 하는 나를 비웃지는 않지만 측은하게 여기는 C가, 사소한 것에 즐거움을 가져 보라며 나츠메 소세키 읽기를 권했을 때, 다시, 또, 책이냐 하며 저항하고 싶기도 했다. 원죄려니 하면서, 책을 잡기 전에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한국근대의 소설가 이광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처럼, 과거를 추억하는 後日譚이 미래를 기억하는 前日譚이 되는 아프지만 유쾌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두 생각 다 틀렸다. 나츠메는 근대적 의미의 계몽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츠메의 소설들은 이광수의 『무정』의 등장인물처럼 생물학이나 수학같은 자연과학을 공부해서 새 문명을 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소설가 김영현의 짧은 평가(『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와 달리, 나츠메와 이광수는 달랐다. 세상 속에 있지만 스스로를 세상과 유리시키려는 고독한 개인들이 거기 있었다. 사소하고 사적이었다. 기다리던 유쾌함도 없었다. 김영현은 나츠메를 읽으며 ‘혁명의 시대’였던 1980년대 한국의 문학을 회억한다. 나도 그랬다.

김영현은 ‘그’ 문학이 시대와 함께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음에 불편해 하면서 나츠메는 “더 이상 아무런 적의도 불편함도 없이 지나간 시간을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츠메를 만나며, 또 김영현과 다르게, 불편했다. 사회과학 공부가 주업인 나에게 나츠메의 소설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불편이, 그 질문이, 광기어린 독서를 하게 했고, 직업병은 해석서를 뒤지게 했다.

나츠메는, 일본근대의 서막인 메이지시대를 살았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이고 영국유학을 했으며 도쿄제국대학에서 가르쳤고, 아사히신문에 취직하면서 소설을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 이력의 나츠메가 그리는 지식인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말의 장사꾼’인 서구적 의미의 지적 노동자(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가 아니다. 메이지시대에 ‘수명이 무한한 생물’인 국가의 일에 관여하면서 천황을 ‘현인신’으로 만들던 지식인도 아니다(다치바나 다카시, 『천황과 도쿄대』). 물론, 제정 러시아에서 기존 질서의 전복을 꿈꾸었던, 나츠메 당대 고토쿠 슈스이와 같은 무정부주의자처럼 천황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비판적 지식인(intelligentsia)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해 성공적으로 유산상속을 받지는 못했지만 근근이 생계 유지할 수 있는 봉건 유제를 간직하면서, 자본과 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지식인들이다.

나츠메가 전근대와 근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인’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나츠메의 문예론은, ‘동양적 근대문학’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의 지식인들이 선택하는자본과 권력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反근대적 삶에는 내용이 없다. 무슨 주의(ism)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무슨 책을 읽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후』의 역자 윤상인의 지적처럼, ‘게으를 수 있는 권리’만을 볼 뿐이다. 삶 그 자체가 형태로 묘사되는 그들은, 삶의 형태로‘만’ 反근대를 표현할 뿐이다. 담론투쟁도 정치투쟁도 하지 않는다. 형태가 존재다.

나츠메는 그 삶의 형태를 ‘개인주의’로 부른다. 곧 자기와 타인, 권력과 의무, 금력과 책임이 함께 가는,국가주의에 반하지만 국가를 부정하지 않는 심지어는 臣民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소박한 개인주의를 그린다. 나츠메에게 그 퇴화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나름의 저항을 표현하는, ‘그 때 거기서’의 ‘급진주의’였다. C의 의도는, 내용의 과잉에 허우적대며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와 우리에게, 사소한 듯 보이지만 존재 그 자체일 수 있는 ‘형태의 급진성’을 지금-여기서 일깨우는 것이지 않았을까하는 급진적 착각에 빠져 본다.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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