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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활로 찾기 활발 … 시류에 밀린 빈약한 논쟁
인문학 활로 찾기 활발 … 시류에 밀린 빈약한 논쟁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12.23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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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학계 흐름을 돌아보다

<인문사회계>

가뜩이나 고사니 위기니 하는 말에 시달리던 인문사회의 경우, 한국연구재단의 출범 예고로 더 힘들었던 한 해이기도 했다. 굵직한 세계적 규모의 학술대회가 잇따랐지만, 학계 내부에서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서술의 자율성이 침해된 희비쌍곡선의 2008년이었다.

지난 7월에는 ‘인간언어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세계언어학자대회가 열렸다. 참가학자 중 한 사람인 수전 로메인 옥스퍼드대 석좌교수는 “영어와 같은 거대언어들이 언어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언어다원주의의 고양을 통해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갈등에 내재하는 가치의 충돌에서 헤어날 수 있는 조화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면서 소수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철학대회는 다양한 국가의 철학자들이 참여해 동서양 철학의 문제의식을 총괄적으로 조망할 기회를 제공했다. 철학대회에 참석했던 엡슈타인 미국 애모리대 교수는 “인문학, 특히 순수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일차적 원인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다”라면서 “인문학의 활로는 문화를 변형시키는 예술, 즉 ‘테크노-휴머니티’(techno-humanities)로서 인문학이 거듭날 때에 발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밖에 올 한해 인문사회계의 특징은 융합 학문적 성격의 학술대회가 비교적 많았다는 점이다. 문제의식의 발굴과 연구방법론의 혁신 그리고 논의의 장 확대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정부 지원 학술프로그램의 한계를 완전히 탈각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연구단이 9월에 개최한 ‘지구화와 문화적 경계들 : 탈경계 문화변동 현상의 비판적 재검토’는 경계를 넘어서는 문화 변동의 현실을 조망하는 자리였다.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등이 12월에 개최한 제5회 동아시아 대안지리학 대회에선 사회과학적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오늘에 대한 성찰과 내일의 전망에 대한 진단이 이뤄졌다.

지역 연구단의 활동도 늘었다. 강원대 인문학 진흥을 위한 인문치료학연구 사업단이 10월과 11월에 연이어 개최한 인문치료학 학술대회는 인문학의 현실적 유용성이라는 오래된 화두에 대한 모색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이 개최한 ‘세계-지역적 실천으로서의 쌀문명’은 지역적 특색을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시켰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저명한 해외학자들의 방한강연도 잇달았다. 지난 9월에 방한한 세계 100대 지성의 한 명이라는 누스바움 시카고대 교수는 애국주의와 감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법에 대한 이성적 강조만으로는 효과적인 정치적 결과를 끌어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해 주목을 받았다. 조절이론과 헤게모니론을 접목,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으로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 변화과정을 추적한 영국 정치사회학자 봅 제솝 랭커스터대 교수의 11월 방한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중앙대 사회학과 창과 1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에 참가, “경제위기에 대한 어떤 자본주의적 해법도 권위주의의 심화로 귀결되기 쉽다”고 우려했는데, 여전히 사회운동의 실효성을 강조한 지적으로 보인다.

법실증주의자로 유명한 영미법철학계 거목 드워킨 교수도 11월에 방한, 자유와 평등의 양립 등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소개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더욱 섬세한 이론”이라 진단했다. 곧 정의와 평등을 세심하게 염두에 둔 법과 자유라는 화두를 제기한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인 프랑스 학자 랑시에르 파리 8대학 교수의 12월 방한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 최근 잇달아 그의 책이 번역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눈길을 끈 것으로 보인다. 랑시에르는 합의가 아니라 불화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방한 인터뷰에서도 “정말 중요한 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선 주장들을 어떻게 수용하는 가”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확장된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했다.

그러나 화려한 주제와 큰 규모로 열린 학술대회 및 방한 강연들이 그에 걸맞는 내실을 기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세계철학대회 같은 경우, 거창했던 외양과 달리 별반 흥미로운 후속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융합학문, 학제 간 연구를 표방한 학술대회 같은 경우엔 수박 겉핥기식으로 몇몇 테마를 짜깁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저명인사들의 잇단 방한은 매스컴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거장이란 이름에 주눅들어 손님모시기 하는 듯한 인상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학문의 씁쓸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런 탓일까. 학계의 성과를 측정하는 진정한 시금석이 돼야 할 학술논쟁은 빈약한 측면이 많았다. 더구나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학문적 사활을 건 학술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는 이명박 정부가 일으킨 풍파에 대응한 것들이 많았다. 올 초에는 사회과학계를 중심으로는 대운하와 성장 논쟁이 있었다. 인수위 시절, 한국환경영향학회의 ‘대운하 관련 특별법’ 반대 입장 표명과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서울대 교수’ 모임 등의 움직임이 대표적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운하 논쟁은 광우병 파동과 경제위기의 심화 속에서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 촛불 시위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 대중의 정치적 역량의 재확인 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촛불이 잦아든 가을 무렵, 계간지들이 일제히 촛불 시위에 대한 글들을 쏟아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 약진할 모처럼의 호의적 정세는 미국발 경제위기의 도래 속에 반전이 됐다. 하반기 들어서 경제위기를 진단하는 심포지엄이 이어졌다. 지난 11월 학단협 등 진보 단체가 개최한 연합심포지엄과 사회경제학회 등이 개최한 공동학술대회는 진보의 관점에서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 자리였다.

2008년 가장 큰 이슈는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파문일 것이다. 뉴라이트의 계속된 압력과 이명박 보수 정권의 탄생이라는 정세 속에서 근현대사 교과서는 결국 관치 수정이라는 전례없는 사태에 직면했다. 교과서 집필진이 가처분 신청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학계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풍경은 학문연구의 자율성, 역사 해석의 다양성 문제를 교훈으로 던져주었다.

이런 와중에도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무거운 학술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들뢰즈철학의 국내 수용에 문제가 있다는 홍준기 서울시립대 HK연구교수의 글에 대해 진태원, 신지영 박사는 논쟁을 끌어내기 위한 무리한 비판이 아니냐며 차분히 응수했다. 

김성동 호서대 교수는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사회생물학, 신경윤리학 등과 더불어 기존 인문학의 개념을 정면에서 해체하고, 그 자연과학적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박중목 명지대 연구교수는 김성동 교수에 대해 발생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논박을 했지만, 하루 이틀에 판가름 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공계>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가 과학기술인 1천 360명과 네티즌 586명의 투표를 통해 발표한 올해 10대 과학기술 뉴스는 순위별로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 탄생 △핵융합연구장치 KSTRA 최초 플라즈마 발생 △과학기술행정체제의 개편과 과학기술계 논란 △암 진단·치료용 나노전달물질 개발 △인류최대 과학장치 대형강입자가속기(LHC) 가동 △휴대폰용 ‘촉각센서’마우스 산업화 △국립과천과학관 개관 △속씨 식물의 쌍둥이 정자 형성 과정 △춤추는 휴머노이드 로봇 ‘마루’국내 첫 개발 △수능 물리문제 복수 정답 수정이다.

이중에서 KSTAR의 최초 플라즈마 발생은 향후 핵융합 연구의 장래를 밝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핵융합은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현재 선진국들이 사활을 걸고 도전하고 있는 과제다. 대형강입자가속기를 통한 실험에는 최영일 성균관대 교수 등 80여명이 넘는 국내 연구진이 참여해 우주의 비밀을 파헤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9월 첫 가동을 하자마자 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등 난관이 많았으나, 조만간 성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은 LHC의 실험 결과에 따라 이론물리학의 좌장이론격인 표준모형의 향배가 결정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화제를 모았던 한국 첫 우주인의 탄생은 실질적인 학문적 성과를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이벤트성 행사를 벌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순수 과학 연구자들 중에는,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이 미비해 연구를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경우도 있다. 또 이공계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가 사회적 이슈가 된지는 이미 오래이며, 이공계 졸업생이 의과대학으로 다시 진학하는 사례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자체 기술도 아닌 러시아 우주선에 탑승해, 별 의미도 없는 실험을 수행하고 오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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