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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책과 책읽기는 나에게 무엇인가
그 많은 책과 책읽기는 나에게 무엇인가
  • 김혜경 서평위원/전북대·사회학
  • 승인 2008.12.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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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그 많은 책은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왜 책을 사는가. 최근 텔레비전에서는 책읽기와 토론을 주제로 한 계몽적 독서프로젝트인 ‘TV, 책을 말하다’라는 식의 프로그램이 장수하고 있고, (독서 문화를 격려하는) 인터넷 독서카페 등이 등장하며 책읽기의 즐거움, 교양의 원천으로서책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개인적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책읽기가 즐겁고, 교양의 원천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른 교수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별로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책 사기와 읽기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공부와 무관한 독서경험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문교부 주도로 교양독서를 고취하기자 시행한 ‘자유교양경시대회’인가 하는 대회가 있었는데 그것도‘학교 명예’를 위해 受賞 목적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 와서 비로소 학교공부와 관련 없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주로 서클 ‘세미나’ 용으로 공부했던 금서류가 중심이었던 것 같다. 교과서 아닌 세미나 책도 재미보다는 ‘발제’용으로 줄을 쳐가며 읽어야 했었다.
그러다보니 고등학교에서나 대학교에서 내게 책읽기의 성격은 소설류를 제외하고는 학습의 기능에 한정됐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대학원을 가고, 박사과정을 진학하면서부터는 조금 독서의 폭이 넓어지긴 했으나 역시 논문쓰기 위한 목적의 책읽기, 즉 기능적·학습적 목적의 독서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8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증가한 복사가게는 영어원서들을 대량 복제해내는 원천이 돼 ‘책읽기의 즐거움’을 ‘책 소유의 물신주의’로 쉽게 바꾸어 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읽어야 할’ 책의 리스트들은 더욱 길어졌다. 특히 수업 외 ‘세미나’의 토대였던 마르크스주의의 복사서적들은 ‘읽(어내)기의 숭고한 괴로움’을 익숙케 하는 데 기여했다.

지금 교수가 돼 나의 책 읽기는 그럼 어떠한가. 결론적으로 수업준비나 논문 집필과 관련된 책읽기, 즉 학습중심의 도구적 읽기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평상시에 신문의 신간소개 등을 통해 읽어야 될 것 같은 책이 발견되면 표시해두고, 논문을 읽다가 중요한 레퍼런스로 언급되는 책을 찾으면 구입대상 목록에 첨가해 두고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책을 주문하는데, 내가 구입하는 책의 80%는 그런 학습자료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구입해서 열심히 읽는 것은 특정 용도의 책으로, 읽고 이해해서 논문을 쓰는데 참고하거나 혹은 강의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그러한 책은 요긴하긴 해도 즐거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노동의 대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나머지 ‘필독서’류의, 새로운 이론적 조류의 신간이나 원서들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처지게 읽거나 미처 읽지도 못한 채 서가를 장식하게 되기도 한다.
세미나 책, 수업자료, 논문 집필을 위한 책 사이를 요리조리 옮겨 다니는 내 책읽기 경험이 즐거움이 될 때는 올 것인가.

나의 이후의 독서생활이 지금처럼 프로젝트나 논문쓰기에 매여서 읽어야 할 책의 리스트들에 포위된 채 지속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좀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가장 책과 가까울 것으로 생각되는 교수집단의 일원으로서 가장 책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아마 우리가 즐기는 영화보기가 평론가들에게는 고역스런 분석과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지.
그나마 학문적 관심을 공유한 동학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이루어지는 토론이 책읽기의 고역을 나눔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작은 창구가 돼주니 불행 중 다행이다.

한마디 바람을 덧붙인다면 단순히 서양이론의 소개가 아니라 그것을 한국의 경험적 현실과연결시켜 일상의 문화변동에 대한 세밀한 질적인 분석까지를 포함한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은, 서구와는 다르지만  이미 상당한 정도로 후기 근대적 개인화의 경로를 밟고 있는, 이미 영상세대로 성장해버린 학생들을 상대로 더 많은 소통의 경로들을 찾아내야 한다.

김혜경 서평위원/전북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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