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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본 카오스와 우연] 비예측성을 읽으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물리학에서 본 카오스와 우연] 비예측성을 읽으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 김승환 포항공대·물리학
  • 승인 2008.12.15 14: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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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간 대화로 읽는 학술키워드12. 우연

 

옛날 사람들은 태초에 세상을 완전한 카오스로 보고 그들의 신들 중 하나를 카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복잡한 자연 현상의 원인을 끊임없이 규명하고자 했고, 인과관계의 일정한 패턴을 예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세계관은 뉴턴의 역학 법칙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고, 라플라스에 의해 뒷받침됐습니다. 세상의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운명이 결정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혁명이 밝혀낸 원자의 세계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확률의 세계입니다. 자연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우연을 바탕으로 한 ‘주사위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호모순의 두 세계 - 미시적 우연과 거시적 결정론은 어떻게 융합될 수 있을까요. 기원전 5세기 ‘원자론’을 처음 주장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일이 ‘우연이냐 필연이냐’하는 명제는 철학적, 종교적 차원의 난제로 인류 역사의 끝없는 논쟁의 근원을 제공해왔습니다. 1970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생물학자인 자크 모노가 저술한 ‘우연과 필연’은 새로운 과학적 접근으로 출간 후 전 세계의 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폴 데이비스에 의하면 이 시기에 시작된 또 하나의 현대과학의 혁명은 ‘복잡성의 과학’입니다. 복잡성의 과학은 우연을 가장한 자연의 복잡성 속에 숨어 있는 질서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우리 주위의 자연과 사회를 더 주의 깊게 관찰하면, 많은 현상이 교과서의 예제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며 역동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변화무쌍한 구름, 계곡의 급류 흐름, 흔들리는 불꽃, 역동적인 생명현상, 주식의 급격한 등락, 인터넷과 사회의 거미줄 망 등은 매우 불규칙하고, 비예측적이며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거시적 세계에서의 비예측성은 주위에서 흔히 관찰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예외적, 비정상적 대상 또는 고전적 방법론의 물리학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과제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예측성은 ‘나비효과’에 의해 결정계에서도 생겨날 수 있으며 이를 카오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카오스는 완전한 우연이 아니며, 그 불규칙성의 이면에는 새로운 형태의 수학적 질서가 존재합니다. 저명한 과학자 더글라스 호프스타더에 의하면 “질서와 카오스는 거울 양쪽의 실상과 허상처럼 분리 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카오스의 미스터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카오스는 전혀 달라 보이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확률론적 세계관을 연결시켜주고 상호 양립이 가능하게해주는 중요한 고리를 제공합니다.

카오스 계들은 비선형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선형계의 경우 출력이 입력에 비례해 결과의 정확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비선형계의 경우 출력과 입력의 상관관계가 비례하지 않고 ‘나비효과’에 의해 비예측성을 낳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뇌도 수많은 비선형 신경세포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복잡계로서 그 활동이 카오스 상태를 보인다는 것이 생리 실험과 뇌파 측정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자연은 카오스의 우연성을 오랫동안 이용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가능성들을 시험해봄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통제된 형태의 우연한 돌연변이를 통해 자연도태를 이겨낼 수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만들어 진화해온 것입니다. 카오스는 우연을 통한 다양성과 함께 제어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게 해주는 바람직한 자연의 알고리즘인 것 같습니다. 또한 카오스의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창의성의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해주고, 결정론적 세계관과 자유의지의 융합이 가능하도록 해줄지도 모릅니다.

이제 카오스가 질서와 예측성의 족쇄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복잡계는 많은 작은 부분들로 엮어져 있어 카오스를 축으로 한 복잡계 과학은 다양한 단계가 엮어진 패턴을 이해, 제어하려는 노력을 시도합니다. 최근 복잡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원리를 공학, 생명현상, 생태계, 경제 및 사회현상에 응용하려는 학문간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조세프 포드에 의하면 “복잡성의 과학은 거시의 세계, 미시 세계에 이어 복잡성의 세계를 다루는 21세기 현대과학의 새로운 흐름” 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학평론가인 하인스 페이겔스는 “무한한 응용가능성을 가진 복잡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21세기 세계의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연과 필연, 카오스와 복잡성의 상관성을 더 잘 이해하면, 기상예측 등 현대사회의 주요 문제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오스는 미시적 세계의 우연과 거시적 세계의 필연을 엮는 유기적 전체의 원리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김승환 포항공대·물리학

펜실베니아대 박사.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문학』, 「띄엄띄엄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띄엄띄엄브리더에 의한 포논 산란」등의 저술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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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외 2008-12-18 20:38:30
이와 같은 원리는 광역세계의 역(逆)으로 소립자의 세계를 향해서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특히 과학에 있어서의 논리적 필연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초극되고, 뉴톤의 필연성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초극되고, 아인슈타인의 필연성이 초끈이론에서 초극되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인생과 우주의 필연성을 완전하게 해명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의 열반적정을 깨달음의 가르침은 2500년 동안 한번도 초극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고, 본래의 근본성을 그대로 유지해오면서 현실화를 위해서 지속적인 발전을 종합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가르침이 조건(緣)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만물(조건)에 대한 통일적 원인(原因)으로서 또는 통일성(統一性)으로서 인간성에 대한 영원불변의 본성(本性)의 이론과 실천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물의; 조건에 대해서 우주적 통일성이며 인간성의 본성의 가르침을 필자는 <형평성(衡平性)>이라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평성을 깨달아서 알게되면 그곳이 태양계이든 은하계이든 우주 그 어느 곳 그 어떤 조건에 있어서도 필연성을 실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를 대원적(大圓寂)이라 하여 원만(圓滿)한 완전성(完全性)이라 하고, 또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자유롭되 바람직한 필연적 결과를 실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영원불변의 <형평성(衡平性)>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외 2008-12-18 20:37:25
필연성은 자연적 필연성과 인위적 필연성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자연(自然)>이란 필연이든 우연이든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필연에 있어서의 필연과 우연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인위적인 측면에 한정된다 할 것이다.

인간 이외의 자연에 있어서의 생명체는 신체적 제한성을 전제로 하는 본능에 의해서 먹이사슬 속에서 자연에 동화되어서 생존을 지속적으로 영위해 나가는데, 이곳에서 오직 본능만이 유일한 생존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먹이사슬은 자연의 물리적환경과 밀점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체적제한성의 먹이사슬을 벗어 난 인간은 언어문자의 문명세계에서 생물적본능을 무한정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는데,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에 인류자신과 지구환경의 종말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위적 필연성은 인간자신의 자유와 논리적필연성의 두 가지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인간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에 대한 필연성은 보편성을 전제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보편성이 전제된다면 우연성이란 없을 것이지만,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모두 우연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필연성이 없는 개인과 사회는 불안정하고 신뢰가 없으며 질서가 없어서 속박과 대립과 투쟁과 파괴가 난무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필연성이 있는 개인과 사회는 안정과 신뢰와 질서가 있어서 자유와 화합과 창의력이 넘치는 것을 뜻한다 할 것이다.

두 번째의 논리적 필연성은 전제조건(緣)의 문제가 된다 할 것이다.

어떤 집합계통에 있어서의 전제조건에 의하면 우연성이란 없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태양계에서의 지구가 가지는 위상으로서의 물리적조건과 태양게가 은하계에서 가지는 조건 그리고 은하계가 우주 전체에서 가지는 조건이 있을 것인데, 이곳에서 지구가 가지는 조건이 지구가 담당 할 수 있는 조정능력의 한계를 넘는 조건을 만나면 그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하계에 있어서의 지구가 가지는 조건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은하계 영역에서의 필연의 조건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우연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