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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인정 취지 훼손 … 더 많은 다양성이 필요하다
검인정 취지 훼손 … 더 많은 다양성이 필요하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12.15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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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무엇이 문제인가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안병만, 이하 교과부)의 수정 권고로 시작된 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의 중심이 결국 정부 측으로 이동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수정 파문의 또 다른 중심에 있던 금성교과서 측은 집필진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28일 교과부의 지시안대로 수정한 교과서 안을 교과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금성출판사는 기존 교과서 집필진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정부 안대로 수정한 교과서를 내놓게 된다. 이에대해 교과서 집필진은 금성교과서의 수정 수용이 있고 난 뒤인 지난달 30일 보도 자료를 통해 “집필자 이름이 명시된 책의 내용을 발행자가 임의로 바꾸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하면서 향후 “법적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며 강경한 대응 방침을 밝혔다. 집필진은 이달 15일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할 것으로 알려져 파장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는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과 관련한 쟁점 사항은 무엇일까. 우선 이명박 정부와 함께 사실상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움직임을 끌어낸 뉴라이트는 △지금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자학적인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서술하고 있으며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으며 △현재 교과서의 검인정 통과 자체가 애초부터 허술했다는 점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10월 30일 내놓은 역사 교과서 수정안은 △친일파 처벌의 미진함을 문제 삼는 부분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견해이고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 무상분배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소유권 제한 등의 한계를 기술할 것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타결에 따른 득실의 균형적 서술을 할 것 △ 급변하는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고려, 최근 상황을 반영한 대북 관계 서술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상의 논란과는 별도로 문제는 역사 해석과 관련된 구체적 논점이 아니라 절차상의 문제라는 지적도 팽배하다. 본래 검정 교과서는 9월 이전에 내년도 분에 대한 주문을 받도록 돼 있다. 그런데 교과부는 10월말에 수정 권고안을 내놓고, 다시 11월말에 수정 지시안을 내놓는 파격을 행하고 있다. 게다가 교과부는 지난 10월 30일 발표한 수정 권고안 관련 보도 자료에서 “11월말까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보완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라고 못을 박고 있어, 과연 교과서 수정의 저의가 무엇이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에 대한 이명박 정부측의 불편한 심기를 이 참에 그대로 분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학계의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視差 때문이다.

한국역사교육학회 회장인 최상훈 서원대 교수(역사교육)는 “어차피 2~3년 뒤면 새로운 교육 과정에 맞춰 새 교과서를 제작하고 심의해야 한다”면서 “만일 기존 교과서에 문제나 다른 견해가 있다면 자구 따위로 트집을 잡으면서 이렇게 강압적이고 급하게 교과서 수정을 몰아 부칠 이유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현행 교과서는 2011년부터는 새로운 교과서로 어차피 바뀌게 돼 있고, 그 과정에서 역사 해석 관점의 문제와 관련해 학계의 논의를 거쳐 수정할 여유가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 해석의 다양성 훼손이다.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교과서가 바뀐 것은 다양성 있는 교육을 위해서였다. 검인정 제도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취지인데, 교과부가 스스로 나서 ‘다양성’을 훼손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볼썽 사납게 비쳐질 수밖에 없다. 최상훈 교수는 “역사는 언제나 이데올로기가 개입할 수밖에 없고, 절대적으로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하지만 지금 뉴라이트와 정부는 관점의 차이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기존의 역사 인식이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에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뉴라이트는, 아직 채택이 되진 않았지만, 대안교과서를 참고용으로 내놓은 바 있다.

이에 대해 교과서포럼(공동대표 박효종·이영훈·서울대, 차상철·충남대)의 운영위원으로 있는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정치학)는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잘 반영하고, 학계에서 검증과 공통의 공감대에 기초해야 한다”면서 “현재의 몇몇 역사교과서는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본래 금성교과서는 최초 검인정 단계에서 허술한 검정 과정 등 문제가 있었다. 더 신중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교과서 집필진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재의 근현대사교과서가 학문적 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용인할 수준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교과부의 김동원 교육과정기획과장도 이번 교과서 수정 결정을 두고 “갑작스런 것이 아니다”라고 운을 뗀 뒤, “국가사회적인 요구가 많았다. 특히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고, 학생이 보는 교재이기 때문에 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변했다. 애초 검인정에 통과했던 교과서를 다시 급하게 수정하려는 것도 “당시에는 최소한의 기준만 통과했던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하는 단체들이 많았고, 당시에 미진했던 부분을 수정할 필요성이 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새로 개편될 예정인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무리한 수정을 감행하고 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또 집필진의 학문적 자율성과 저작권을 침해하는 모양새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한편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학)는 <역사비평> 최근호(2008년 겨울호)에 실은 「국가, 과거의 힘, 역사의 효용-이른바 ‘역사 교과서 갈등’에 부쳐」에서 영국과 미국 신우익의 교과서 수정 논란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최 교수는 영국과 미국 신우익의 역사서술이 기존 역사학에 대한 불편한 심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최근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스텝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신우익은 영미의 민족주의와 달리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영미의 신우익 공세는 30년 전의 일로서, 이미 신보수주의가 몰락하고 있는 지금의 세계정세는 신우익의 준거틀을 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지시 파문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사회의 ‘역사 해석’의 다원성, 가치의 다양성을 바라보는 학문적 자율성의 리트머스시험지를 만들어냈다. 학자들의 소신있는 학문연구와, 이에 근거한 교과서 서술이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지 못한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자들이 정권 實勢와 주류 담론의 눈치를 살피는 희화적 일이 벌어지지 않을 보장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더 많은 학문 다양성과 민주적 절차의 옹호라는 거시적 시각을 고민할 때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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