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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제목을 사지선다형으로 맞춰야 하는 시험이라니!
詩의 제목을 사지선다형으로 맞춰야 하는 시험이라니!
  • 홍훈 서평위원/연세대·경제학
  • 승인 2008.12.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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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원래 나는 외국어를 좋아해 또래의 평균 수준보다 외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입했다. 그런데 오십 전후로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애착이 커져, 어려서 배운 후 돌보지 않았던 한문에 대한 애정도 약간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런 변화를 이리저리 반추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과 독서가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말과 글에 애정이 클수록 우리 책에 대한 관심도 높다는 일반론만이 아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것이 독서와 책시장이 활발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각급 학교에서의 우리말·글 교육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주장도 곁들이고 싶다.경제학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책하면 번역지원이나 우수도서선정, 그리고 보조금 등을 연상한다. 그런데 책의 가격과 소득이나 정부의 보조금을 말하기에 앞서 책에 대한 기호나 습관을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선호나 기호가 주어져 있다고 판단해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호나 습관은 여러 방식으로 형성되고 또한 변동한다고 봐야 한다. 이를 유전자나 진화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다. 책의 종류나 내용에 대한 선호, 독서방식 등은 주로 가정 생활, 학교 교육, 그리고 사회의 구조나 이념을 통해 주로 형성된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과거시험으로 인해 유교에 부합되는 책과 이에 부합되는 책읽기가 지배했다.

개화기에는 미국이나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흐름이 책의 내용이나 독서방식을 압도했다. 해방이후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대세가 우리를 뒤덮고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로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창궐하고 있는 영어중시는 우리글로 된 책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선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우리글을 지키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총칼이 아니라 달러와 자본의 힘 앞에서 우리글과 말에 대한 애정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우리글로 쓴 책 없이 우리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다. 또한 제대로 사고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이 키워져야 외국말이나 글 그리고 외국문물에 대한 관심이 제대로 육성될 수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책의 운명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갈등이 거론돼 왔다. 유익한 책은 잘 팔리지 않고 잘 팔리는 책은 유익하지 않다고들 한다. 혹은 책을 읽고 싶은 자는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자는 책이 필요 없다고도 한다. 그래서 책은 언제나 잘 팔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이 교육, 의료, 주거, 공연예술 등과 같이 시장질서에 쉽게 정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한국사회에는 이런 보편적인 상황에 특수한 사회문제가 결합돼 있다.
바로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을 계승한 대학입시다. 한국 사회에서는 입학시험이 우리가 선택하는 책과, 책을 읽는 습관을 상당부분 결정한다. 이렇게 형성된 기호나 습관을 그대로 안고 책을 소비하기 때문에 인문학과 출판계에 어려움이 생긴다.

한국의 입시준비에서는 읽고 쓰고 말하기의 선순환을 병영 속의 입시전쟁준비가 대신한다. 논술내용조차 생각 없이 외우는 주입식교육은 지적인 호기심이나 인문학적인 상상력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말과 글의 맛도 함께 파묻히고 있다. 국어가 영어나 수학에 밀리고, 국어자체도 우리말·글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내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고교시절 국어시험 문제는 시나 지문을 주고 글의 제목을 사지선다형으로 맞추는 것이었다.

호기심이나 상상력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그리고 지극히 세속적인 경제활동 등 모든 인간의 활동에서 불가결하다. 최근에는 경제학조차 인간이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쌍두마차라는 플라톤의 명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상상력과 고전을 위시한 책에 대한 사랑은 상호의존적이다.

홍훈 서평위원/연세대·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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