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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짓밟아라, 되살아날지니
[Cogitamus]짓밟아라, 되살아날지니
  • 곽차섭 부산대·서양사
  • 승인 2008.12.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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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차섭 부산대·서양사

책은 사상과 의견을 주장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물이다. 따라서 위정자들에게 책은 자신의 통치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지만, 때로는 항거와 背德의 정서를 부추기는 위험한 물건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책을 통제하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사상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책을 통제하는 통상적인 방법은 검열이다. 검열에 걸린 책은 일부가 삭제되든가 압수된다.

삭제가 경고나 시정명령쯤에 해당된다면, 압수는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 같다. 책에 대한 유죄판결에는 비밀저장소에 모아두든지 불태우든지 두 경우밖에 없다. 전자가 책의 무기징역이라면 후자는 사형인 셈이다. 책이란 것이 통상 불에는 극히 취약한 양피지나 종이로 돼 있다 보니, 사형이란 곧 화형을 뜻한다. 역사는 이렇게 ‘화형’ 당한 책들을 다수 기록하고 있다. 1494년 말, 메디치가가 득세하던 피렌체는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여파로 도미니코 교단의 산마르코 수도원장이던 사보나롤라의 급진 공화정으로 바뀐다.

그는 배덕과 타락에 대한 신의 응징에 대해 설교하며 피렌체 사람들을 손아귀에 틀어쥔다. 4년에 걸친 그의 통치 말년에 있었던 유명한 사건이 이른바 ‘허영의 모닥불’이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그의 ‘홍위병’이 가가호호를 돌며 ‘허영’의 물품들을 모은다(사실은 강제로 빼앗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정무궁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다가 전통적인 카니발 날짜에 맞춰 그것으로 모닥불을 피우면서 이단적 축제를 비난하는 노래를 부른다.

카니발을 기독교식으로 패러디한 셈이다. 이 허영의 모닥불 속에서 사그라진 것을 보면, 포커 카드, 체스판, 가발, 거울, 인형, 화장품, 향수병, 악기, 사치스러운 옷과 보석, 여인의 나체를 묘사한 그림과 彫像 등인데, 여기에는 물론 라틴어나 속어로 된 ‘더러운’ 책들도 빠질 수 없었다.

바자리는 『봄』과 『비너스의 탄생』처럼 이교적 주제를 애호했던 보티첼리가 그의 설교를 듣고 그를 따르는 ‘피아뇨니’ 즉 泣禱派의 일원이 돼 화가로서의 삶을 내팽개쳐 버렸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사보나롤라가 ‘더럽다’고 한 책에는 대개 에로틱한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르네상스를 고전고대의 가치를 복원하려 한 일종의 문화 운동이라고 볼 때, 그 과정에서 고대인의 삶 속에 깊이 내재해 있던 세속주의적 경향이 기독교적 가치를 신봉하던 당시의 도덕론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새로운 몸의 미학’을 보여주는 르네상스기 에로티즘/포르노그래피는 화형의 표적이 됐다.

우리는 16세기 초 ‘괴짜’ 논객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일화에서 또 다시 이런 유의 처형 장면을 목도한다. 1523년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는 바티칸 궁 콘스탄티누스 홀에다 16가지 체위로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고 한다. 이 그림들은 곧 당대의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에 의해 판각되고 파르마에서 인쇄돼 인기리에 팔려나간다. 교황은 이에 진노해(왜. 그 진귀한 그림을 아무나 보니까) 이 음란한 소책자를 모두 압수하라 명한다. 줄리오는 몸을 피했으나 라이몬디는 투옥된다.

 
아레티노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즈음이다. 그는 판각 각 장면마다 그림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16편의 『음란한 소네트』를 지어 붙인 것이다. 그는 뒤에 친구인 바티스타 자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때의 정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그 야단인지 궁금해서 그 그림들을 본 순간, “줄리오로 하여금 그것을 그리게 만든 것과 똑같은 어떤 분위기에 휩싸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여인이야말로 “인류 탄생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축제일에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不死의 음료”라고 칭송을 거듭한 뒤, 자신이 과연 “각 체위 하에 있는 연인들을 시로 자연스럽게 그려냈는지 어떤지 봐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그림과 글이 합쳐진 서양 역사 최초의 포르노그래피가 탄생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후 ‘체위들’이라는 뜻의 ‘포지치오니’ 혹은 ‘이 모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레티노의 소네트는 코르티자나(르네상스 기의 고급 창녀)와 손님이 성적 행위를 더 잘 탐닉할 수 있도록 극히 노골적인 표현과 다양한 세부 묘사를 통해 서로를 부추기는 내용을 남녀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체위』는 그야말로 르네상스기에 판매를 목적으로 제작된 가장 유명한 에로티카였고, 이후 이 방면의 원형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황이 이 두 번째 에로티카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전부 몰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아마 책을 불태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사본은 극소수의 파편들 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화형의 순간을 모면한 한 사본 으로부터 그 대강의 면모를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구사일생이 따로 없다. 칼로 펜을 박해할 수는 있어도 펜을 아주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곽차섭 부산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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