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寡作의 辨
寡作의 辨
  • 교수신문
  • 승인 2002.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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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南冥 유적에 다녀왔습니다. 봄안개에 흐린 천왕봉을 바라보며 단아하게 앉은 山天齋는 선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을’ 의연의 경지를 다짐하며 남명은 이 산중으로 들어와 處士로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문득,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될 것을 노래한 靑馬의 시상이 남명에게서 유래하지는 않았을까 억측해 보았습니다.

퇴계는 남명을 가리켜 ‘도리를 알지 못하는 奇士’라고 평했다지만,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 평이 적절한지, 또 우리의 정신사에서 남명의 자리가 어떠한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성현의 말씀에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다’(程朱後不必著述)는 남명의 정신에는 공감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 정신 때문에 寡作이어서 학문의 높이와 깊이에 비해 남긴 저술이 적다고 안내를 맡은 장 교수는 아쉬워했지만, 아마도 남명으로서는 ‘책을 짓고 말을 세우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을 앞에 두는’(下學上達) 공부를 강조하고, 사변 가득한 空論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부박한 세태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학식을 삼가 낮추는 겸손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물론 과작 그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태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자신의 견해를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활발히 소통시킴으로써 지식을 공유하고 진전시키는 데에도 과작은 유리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익지도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은 요설을 마구 떠벌이는 것은 더 나태하고 퇴행적인 일일 것입니다. 근래 ‘써라 아니면 죽어라’(publish or perish)는 압력에 떠밀려 저도 되지 않는 글을 중구난방으로 써대고 있습니다만, 남명이 꾸짖는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을 속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泰山壁立과 秋霜烈日의 기상을 지닌 남명을 두고 나태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예의를 벗어난 일이고, 임진란을 당하여 남명의 문하에서 80여명의 의병장이 나왔다는 전언에 비추어 보면 과작이라 하여 꼭 학식의 전수에 불리한 것만도 아닌 듯 싶었습니다. 매화 꽃망울에 스치는 고즈넉한 바람으로 俗氣를 씻고 돌아오는 길에, 쓰거나 죽으라고 몰아대는 오늘의 천박한 대학 풍토에서는 죽을 힘을 다하여 쓰는 것이 그나마 남명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헤아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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