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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藤田省三과 땅끝에 선 사람들
[문화비평] 藤田省三과 땅끝에 선 사람들
  •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 승인 2008.11.10 15: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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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은 불안감이다. 경제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대통령후보에게 다른 자질은 전혀 묻지 않고 몰표를 몰아준 이유는 이 불안감 때문이었다. 경제지상주의와 무한생존경쟁시대를 맞아 한번 밀려나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극사실주의적 현실의식이 결국 떠받쳐준 당선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직장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건강해도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해도 불안하며, 성공해도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불안하다.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가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스승도 없이 각자 돈벌이에만 올인하는 끝없는 경쟁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윤리나 미학은 대학교양과목으로도 팔리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관심은 애완동물에 대한 배려에도 못 미칠 지경이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삶도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깨달음이 됐고, 투기와 사기는 이런 불안한 시대의 강을 건널 유일한 방법이 돼 버렸다. 치고 빠지는 기술이 최고의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되고, 불안을 먹고 자라는 보험산업, 펀드산업, 오락산업, 노름산업 등이 최고의 돈벌이 산업으로 떠올랐다. 


우리시대의 불안은 과학지식이 없던 시절 인류가 자연과 우주에  막연히 느꼈던 신비적 두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우리시대의 불안은 자본주의 초기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두려움과도 다르다. 단결할 노조조차 없고, 계급적 당파성조차 모호한 무한계약직, 혹은 임시비정규직이 모든 경제분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프리케리아트’(precariat)란 말은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에서 나왔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널리 퍼진 일시적, 유동적, 간헐적, 비공식적 노동조건의 확산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불안이 이들의 전반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리케리아트는 우리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한 전혀 새로운 세대이며, 초국적 후기산업자본주의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전방위적인 자본의 공격에 노출돼 있지만 사람들은 단결할 계급의식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더욱 파편화되고 말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공포로 위기상황은 일상화됐지만,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오직 혼자서만 분투하다 절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것은 지금 확산일로에 있는 이 프리케리아트들인지 모른다. 


원래 ‘프리케리어스’는 ‘기도에 의해 얻어지는’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이 말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위험에 대한 민중의 인식과 동시에 그런 삶의 불확실성을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해 순정의 기도로 이겨내려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케리아트는 원래의 종교적 실존의식과는 무관한 채 오직 경제적으로 끝없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리며 불안해하는 우리시대의 모든 약자들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의 삶의 평화란 경제적 성공으로만 보장될 수밖에 없다. 즉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가 만들어낼 안락에의 평화이다.


일본의 현대문명사상가인 후지따 쇼오조오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라는 글에서 억제라고는 모르는 고도 기술사회의 정신적 기초가 바로 이 경제인간들의 안락에 대한 광적인 추구와 안락의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이라면서, 이런 정신상태는 마침내 안락에 예속 되고, 따라서 사회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기가 두렵다. 실직이나부도로 인한 사람들의 자살소식이 너무 많아서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낄 때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에 의지해서라도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토로했듯이 인간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금 우리세대는 강을 건널 배도 없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을 눈도 없이 그저 무작정 강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쇼오조오가 말한 이런 안락한 지상의 평화에서 내몰린 우리시대의 프리케리아트에게는 차라리 사람의 운명이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믿었던 과거 희랍시대가 어쩌면 더 안전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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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2008-11-17 10:44:19
절대로 읽어 보지 말라는 당부에 읽었더니 역시,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