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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풍경] : 렘브란트 판화전
[예술계풍경] : 렘브란트 판화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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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8 00:00:00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 할 때 그것은 곧 ‘어둠의 화가’라는 것과도 통한다. 빛과 어둠은 따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빛보다 어둠의 질감을 더 잘 표현했고, 어둠을 살려 빛을 만들어낸 렘브란트는 그래서 천재였다. 예술의 전당에서 12월 29일부터 2월 17일까지 열린 렘브란트 판화전에서 맞닥뜨린 것은 빛과 어둠이 빚어낸 환상적인 군무였다.

네덜란드 렘브란트 하우스에서 특별히 보내온 판화 90여 점은 생전에 남긴 290여점의 일부이지만, 렘브란트 판화의 진면목을 보기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풍속화, 성화, 초상화, 풍경화 등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된 저마다의 작품들은 그가 장르나 소재를 훌쩍 뛰어넘은 대가임을 느끼게 해준다.

안개 자욱한 네덜란드의 풍경은 몽환적이고, 초상화는 머리카락과 땀구멍 하나까지 세밀해서 숨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 하다. 성화는 웅장하고 풍속화는 익살스럽고 정겹다. 손바닥 크기 만한 동판에 수천 가닥의 선을 자유자재로 그려낸 기교가 놀랍고, 쓱쓱 그려낸 듯 경쾌한 선 사이사이에서 화가의 숨결과 영혼이 느껴지는 경험은 더더욱 놀랍다.

저마다 강한 개성을 가진 판화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인간적인’ 면모는 聖畵에도 드러나 있다. 그는 특히 성서 속 극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즐겨 그렸는데 주 모델은 아브라함, 야곱 등 신과 인간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이다. 설교하는 그리스도를 둘러싼 인물들의 표정 또한 여타 성화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하고 근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딴전 피우고 키득거리며 웃고 넋을 잃고 경청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국의 진기한 물품들을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고 우스꽝스러운 자화상 그리기를 즐겼던 어린애 같은 렘브란트의 성품이 범속하고 분방한 판화 작업을 평생 놓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농부, 쥐잡는 사람, 걸인, 농부의 아낙들은 저마다 17세기 활달한 기운이 넘쳐나던 네덜란드 농촌의 정서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전시된 판화 중 17점의 자화상은 24세 때인 1630년부터 42세 때인 1648년까지 천재 화가의 20년간 생의 궤적이다. 스무 살의 얼굴은 얄궂고 개구지며 서른살의 얼굴은 거만하다. 돈과 명예를 쥐었다 놓아버린 마흔 살의 얼굴은 어딘가 신산스럽다. 세속과 성스러움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천재는 아무래도 생의 덧없음을 알아버린 듯하다. 그래서일까, 천재의 얼굴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까닭은.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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