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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철학, 정신병을 특권화하는 배타적 이론 아닌가
들뢰즈 철학, 정신병을 특권화하는 배타적 이론 아닌가
  • 홍준기 서울시립대 HK교수·철학
  • 승인 2008.11.1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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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497호 신지영 박사의 반론을 읽고

이번 논쟁은 홍준기 교수의 <진보평론> 논문에 대한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의 비판에서 시작됐다(교수신문 495호). 홍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알튀세르를 반헤겔주의자로 보고, 들뢰즈를 찬양하는 국내의 프랑스 철학 수용 풍토를 편협하고 독단적이라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진 교수는 동료학자를 적으로 매도하지 말라며, 홍 교수가 과도한 이분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이에 대해 본지 496호에서 진 교수가 텍스트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어 497호에서 신지영 한국외대 강사는 들뢰즈에 대한 홍 교수의 지적을 문제 삼았다. 즉, 헤겔과 들뢰즈 중 누가 더 우월한가를 따지지 말고 상호보완적, 통합적 사유를 권유했다. 그러나 신 박사는 은연중 들뢰즈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차원을 사유했다며, 들뢰즈의 손을 들었다. 이에 홍 교수가 재반박문을 보내와 싣는다.
알튀세르, 들뢰즈, 라깡 등의 수용에 관한 이 논쟁은 인터넷 교수신문(www.kyosu.net)이슈 토론방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할 예정이다.

신지영 박사는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에서 라깡·헤겔과 들뢰즈를 통합하는 이론을 사유해야 한다고 요청하면서 자신의 반론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긍정적인 제안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필자 역시 이러한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박사의 논의에는 여전히 필자가 우려하는, 중대한 라깡·헤겔 오독이 있으며, 이 점에서 여전히 신 교수는 “들뢰즈의 (정신분석·헤겔)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라깡과 정신분석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신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라깡이 분석의 끝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통해 시니피앙 너머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일 것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전체-되기(운동)를 말하는데 헤겔·라깡은 전체라는 미래로 가기(가짜 운동)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혁명적으로-되기가 아닌 언제나 오지 않을 혁명의 미래 말이다.” 이렇듯 신 박사는 여기에서 들뢰즈와 라깡·헤겔의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과연 정당한가. 라깡에서 분석의 끝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너머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들뢰즈가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이유 중의 하나가 정신분석학에는 이러한 차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다른 곳(「정신분석의 끝: 환상의 통과, 주체적 궁핍, 증상과의 동일화―역자해제」, 조엘 도르, 『프로이트·라깡 정신분석 임상』)에서 밝혔듯이 적어도 정신분석의 라깡적 버전에는 오이디푸스의 너머, 즉 분석의 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 박사의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들뢰즈의 비판(오독)보다 더 강력한 정신분석학 비판(오독)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너머, 즉 ‘분석의 끝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라는 식의 비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어떤 경우든’ 정신분석학은 ‘불가능한’ 학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 박사에 따르면 “헤겔·라깡은 전체라는 미래로 가기(가짜 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들뢰즈는 내재적 철학이고, 헤겔·라깡은 부정신학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진보평론>에 발표한 필자의 논문과 그 밖의 여러 저서 및 논문에서 밝히고자 했던 내용이다. 분석의 끝이란 헤겔식으로 말하면 이념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즉 부정성과 모순을 극복하고 혹은 인정하고 ‘긍정성’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깡은 분석의 끝에서 주체가 도달하는 상태를 ‘주체적 궁핍’이라고 불렀고, 이것은 ‘존재의 (포기가 아니라) 획득’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라깡에서 분석의 끝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긍정적인 현재적’ 사건으로서, ‘오이디푸스의 너머’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 박사는 분석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째서 들뢰즈가 말하는 전체되기는 가능하고, 라깡이 말하는 전체되기(분석의 끝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한가. 오히려 들뢰즈가 말하는 전체되기가 더 불가능한 것인 아닌지. 하지만 신 박사는 “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통해 시니피앙 너머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 박사는 라깡은 결코 시니피앙만 가지고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들뢰즈와 달리 라깡은 충동, 실재, 기호, 기표(시니피앙), 수학소, 상상계 등 다양한 범주들을 반드시 필요한 범주들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결코 시니피앙만 가지고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여기에서 라깡과 들뢰즈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들뢰즈는 실재만을 강조하고, 라깡은 상징계, 상상계, 실재, 이 세 범주를 모두 중시한다. 하지만 들뢰즈의 라깡 비판은 마치 라깡이 상징계(시니피앙, 결여)라는 범주로만 사유했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들뢰즈의 이러한 라깡 오독은 그것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건 비의도적인 것이었든 라깡 이론에 대한 수많은 선입관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재만을 중시하는 들뢰즈 철학은 정신병을 특권화하는 배타적인 ‘불가능한’ 이론이고, 실재, 상징계, 상상계를 모두 인정하는 라깡 이론은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모두를 동등한 실존형태로 인정하는 열린 이론이다.  

지면 관계로 헤겔과 모순의 문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신 박사가 헤겔과 관련해 주장한 바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들뢰즈는 헤겔을 결코 오독하지 않았다.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한 이유는 헤겔이 부정과 모순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이가 헤겔에 의해 선취됐다고 말한다고 해도, 헤겔이 정신-주체-자아의 개념화를 말하면서부터 둘(들뢰즈와 헤겔)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다).” 사실 이는 정확한 지적이며, 정확히 들뢰즈의 철학적 입장에 부합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도 들뢰즈가 취하는 철학적 입장이 결여와 부정, 모순이 없는 정신병적 존재론 혹은 스피노자적 존재론(스피노자가 정신병자라는 말은 아니다)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가.

들뢰즈가 싫어하는 헤겔적 ‘정신-주체-자아’는 다름 아닌 상징적 차원에서 발생하며, 라깡에 따르면 이러한 차원에 도달한 주체가 바로 신경증자이다. 모순, 부정, 결여 등의 범주가 신경증자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중요한 범주인 것이다(그렇다고 신경증자에게 차이, 충동, 연속 등의 범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반면, 모순과 부정, 결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주체(사실 라깡에 따르면, 그리고 들뢰즈에 따르더라도 엄밀히 말해 이러한 주체는 주체가 아니다)는 정신병자이다. 이렇듯 라깡은 헤겔의 모순, 부정 등의 개념과 관련해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이라는 실존범주(물론 이는 정신분석적 정신병리학의 핵심범주이기도 하다)를 도출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겔이 모순과 부정이라는 범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했다는 신 박사의 주장은 올바른 주장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들뢰즈는 결여와 모순이 없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혹은 슈레버의 정신병적 존재론을 배타적으로 특권화하는 이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 박사는 모순과 부정의 범주가 없어도 규정과 조직이 생겨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사실 이때 가능한 것은 단지 정신병적 규정과 조직이라는 것이 라깡·헤겔의 논지다. 또한 신 박사도 인정하고 있듯 모순과 부정 개념을 제거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약자와 강자의 문제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의 전문가’인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정신분석적 해석을 요청한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면상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이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에만 우리는 비로소 라깡·헤겔과 들뢰즈의 ‘종합’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홍준기 서울시립대 HK교수·철학

필자는 독일 브레멘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저서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이, 논문으로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과 라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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