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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를 시작하며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를 시작하며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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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론’에서 ‘온생명’까지 치열한 지적 고투의 현장
구체적인 우리 현실을 이론화할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지식의 종속성과 허구성을 동시에 걷어낼 수는 없는가. 일단 그 작업의 흔적을 과거에서 추적하기로 했다. 이 기획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또 함께 고민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을 소장 연구자들의 지식을 빌리기로 했다. 여기서는 기획을 마련한 취지와 간략한 지도를 펼쳐보이려 한다.

한국지성사에서 ‘우리 이론’의 면모를 갖추면서 가장 빼어난 문제의식을 보여준 논의는 무엇이었나. 이에 우리신문은 교수 및 전문연구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다양한 지적 산물들이 쏟아졌다. 답변자마다 무엇을 ‘우리 이론’으로 설정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기준을 제시했던 것이다.

세계를 우리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학문의 종속성을 지적하는 의견들도 상당하다. 그러나 자생담론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부재했던 것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우리 지식인들은 독특한 이론을 설정해 세계를 해석하려 노력해왔던 것. 그러나 그 이론들은 오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 고군분투의 노력이 큰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고 국소적인 외침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재평가 작업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

잣대는 독창성과 현실성

물론 우리 이론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만은 않다. 이에 산술적인 결과로 평가항목을 가리는 일을 피하려 했다. 다양한 개별 분야의 전문가들과 깊게 상의하는 일이 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강의 결과가 나왔고, 그 대부분은 향후 기획에 반영될 것이다. 또 개별 항목에 대한 치열한 논의 과정 속에서 ‘우리 이론’은 과연 무엇인지 공방이 오갈 것이 분명하다. 다소 산만한 밑그림으로 대화하는 과정에서도 몇 가지 관점만은 유지했는데, ‘우리’에 걸맞은 독창적 이론작업과 그 이론의 ‘현실성’이 그것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 등의 ‘탈식민주의 글쓰기’를 가장 돋보이는 우리이론으로 꼽는 견해가 많았다. “근대적, 서구적 논문 형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모색을 담아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논문 글쓰기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형식적 측면에서 자생적 학문의 모색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찾고 싶다”는 게 배병삼 성심외국어대 교수(정치학)의 평가다. 김정근 부산대 교수(문헌정보학)는 시각의 종속성이 가져오는 폐혜와 비효율성에 대한 뚜렷한 성찰, 문제를 우리 시각으로 천착하는 구체적 실천, 학문후속세대를 유도하는 길잡이 역할의 세 측면에서 볼 때 조한혜정 교수 등의 논의가 가장 돋보인다고 답했다.

백낙청 서울대 교수(영문학)의 ‘분단체제론’을 높이 사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안치운 서울대 강사(연극학)는 “분단은 지구상에서 한국만이 겪고 있는 현실이되 고착화되어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분열시키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돼야만 우리의 삶이 온삶이 되고, 온생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분단체제론의 의의를 되새겼다. 장석만 서울대 강사(종교학)는 “분단체제론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기대에 못 미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는 논의의 확산이 요청된다”며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가치에 비해 토론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도 상당했는데, 김진호 목사(한백교회·당대비평 편집위원)는 “민중신학은 특히 현대 서구 주류 신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신학하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론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고 답했다. 박명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도 “가장 서구적 주제인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토착화·한국화한 최초의,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시도로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연구와 실천을 일치시키려 노력함으로써 신학이 현실과 유리된 추상의 학문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돼 있는가를 보여줬다. 순수 이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시도는 해방 이후 가장 성공적인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높은 점수를 주었다.

구체적 현실 사유속에 핀 자생담론

조동일 서울대 교수(국문학)의 작업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렸는데, ‘세계문학사 작업’과 ‘우리학문하기’로 평가가 나뉜 것. 그러나 그가 자생적 담론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대표적 지식인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의 ‘동양학 논쟁’이 좋은 평가를 받은 데에서 새삼 그의 영향력을 유추하게 된다. 문화평론가 김성기는 “김용옥의 ‘동양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여러 논문은, 이 땅에서 학문한다는 행위의 본질적 한계와 그 돌파 가능성을 보여준 역작이라고 보는데, 그간 여러 이유로 인해 전혀 본격 토론이 되지 못했다. 우리 학계는 그의 문제제기에 대해 정면 응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배병삼 교수는 80년대 중반 이후 돌출하여 한국의 동양학 연구 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린 김용옥의 일련의 작업들에 대한 옹호·비판 양면의 접근 필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역사학)의 ‘경제사학’ 또는 ‘내재적 발전사학’에 대해서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우리 역사와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해석과정에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우리 이론’으로 선정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뿐만 아니라 김용섭의 경제사학은 미디어를 통한 영향력 부풀리기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서도 독자적인 이론과 학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학계의 체질을 강화했다”고 분석했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역사학)도 “한국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기초한 논리, 다른 연구자나 인접분야 연구에 영향을 미친 파급력, 한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 문제제기로 끝나는 일회적이거나 실험적인 성격이 아니며 국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라는 기준에서 볼 때 김용섭 교수의 연구가 가장 돋보인다”고 답했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이 이룩한 ‘분단사학’도 빼놓을 수 없다. 박명림 교수는 “강만길의 사학은 기존의 전통적인 한국사학과 크게 다른데, 우선 그는 역사학을 과거사에 관한 먼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오늘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점을 최초로 보여줬다. 그의 연구포괄시기는 조선후기부터 광주항쟁까지 걸쳐있다. 그에게 역사학은 그 학문 본령 그대로 실천학문이자 현실학문이고 해석의 학문이었으며, 밑으로부터의 시각을 통해 근현대 역사상 전체를 재구성하려 시도했다. 우리 학계가 이 점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은 큰 안타까움이다. 분단사학, 민중사학은 그의 이러한 이론적 깊이의 한 측면일 뿐”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회익 서울대 교수(물리학)의 ‘온생명’에 대해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학제간의 벽을 뛰어넘어 물리학, 생물학, 생태철학을 포괄할 수 있는 자생적 이론체계를 내놓은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심미적 이성(김우창), 생명사상(김지하), 민족경제론(박현채), 내재적 접근(송두율) 등도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사회구성체와 변혁논쟁’에 대해 강성호 순천대 교수(역사학)는 “1980년대 활성화된 사회민주화과정에서 제기된 논쟁들이 제대로 천착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림으로써 우리 사회에 대한 전반전인 이론적 틀을 수립하지 못한 점을 다시 생각해보고 21세기에 새로운 틀을 같이 모색해보자는 의미”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한국지식의 활로 모색

한편 한국사회과학론(김동춘),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90년대 소수자운동론(윤수종 등), W이론(이면우), 일상적 파시즘(임지현), 중민론(한상진), 자생풍수(최창조), 역사사회학(신용하), 한국민주주의론(최장집) 등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의견을 청취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설문조사에서 평가받지 못한 민중경제론(유인호) 등 기타 이론에 대해서도 면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 이론’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마다 해석이 다르기에 기준을 마련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다만 앞으로 펼쳐질 ‘우리 이론’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 속에서, 오늘 한국 지식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과거를 거울삼아야 새로운 이론의 바탕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신문은 이 기획의 문을 최대한 열어 놓아 많은 지식인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참여를 이끌 계획이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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