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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사이폰(siphon) 경제학
[문화비평] 사이폰(siphon) 경제학
  •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 승인 2008.10.21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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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경제논리 가운데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부유한 계층이 경제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세금을 줄여주고 규제를 풀어주면 그 효과가 낙숫물처럼 떨어져 가난한 계층까지도 덕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경제의 파이를 키워야 나눠줄 떡고물이라도 생긴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빵이면 다 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나아가 최근의 경제위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 대다수 서민들이 겪는 실물경제와는 정반대라는 점에서도 위선적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연 땅에서 물이 증발하지 않는데도 하늘에서 비가 내릴 수 있는가. 최근에 개봉한 영국감독 켄 로치(Ken Loach)의 「자유로운 세계(It’s a free world)」는 부유한 국가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풍요가 실제로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2000년 들어 영국 런던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어디나 최근까지 그랬듯이 폭등하는 집값과 건설경기로 경제 활황의 시대를 맞게 되고, 이에 따라 폭주하는 제조업과 건설현장의 수급을 값싼 이주노동자들로 채우게 된다. 이들은 주로 폴란드나 루마니아 같은 가난한 동유럽 출신들이지만 사실은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온 불법이주자들도 있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는 말처럼 물론 영국자본가들에게 가장 좋은 노동자는 이들 불법체류자들이다. 왜냐하면 신분이 불안정할수록 값은 더 싸고, 말은 더 잘 듣기 때문이다.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하자 자신의 인력회사를 새로 꾸린 주인공 앤지는 처음에는 법을 준수하며 사업하려고 작정하지만 얼마안가 실제로 돈이란 법과 멀어질수록 더 잘 들어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법체류자들을 헐값에 위험한 일터로 내몰고, 심지어는 이들의 알량한 임금마저도 갈취하면서 그녀 자신은 차도 새로 바꾸고, 사무실도 새로 내게 된다. 자신의 풍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망각한 채 더 많은 불법이주자를 고용하고, 현재의 임금을 불평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미래의 파이를 약속한다. 하지만 미래의 파이는 결코 낙숫물이 되어 이들에게로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극도의 탐욕과 경쟁을 무한정 용인하기에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게 되고 결국 혜택이 떨어지기 전에 허울 좋은 풍요의 거품이 먼저 터지게 되기 때문이다. 앤지는 불만을 품은 불법노동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게 되고, 영화는 다시 처음처럼 그녀가 또 다른 인력회사에 고용돼 결국 노동자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적하이론은 불만을 터트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해 미래의 풍요로 이들을 회유하는 것이지만 사실 노동자들은 돈이 그렇게 돌지 않는다는 것을 경제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돈이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이폰(siphon)처럼 아래에서 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경제가 역사상 유례없이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점점 더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사이폰이 빨아 올린 양만큼 땅바닥으로 낙숫물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잘 순환되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갑자기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가 올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혹자는 그냥 금융위기로 끝날거라고도 하고, 혹자는 실물경제까지 영향을 미쳐 앞으로 제2의 국가부도사태가 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신문기사를 보면서 졸업을 앞 둔 학생들의 얼굴을 보라보면 학생들 못지않게 마음이 불안해진다. 추운 겨울과 함께 졸업은 다가오는데, 취업은 더욱 어려워지고, 설령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이들의 불안한 미래가 말할 수 없이 두렵기 때문이다. 알뜰하게 돈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아이도 키워야 할 이들이 그 문턱에 서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경제를 더 키워야 하는가. 파이를 어디까지 키워야 그만이라고 할 것인가. 이들이 좋아하는 책도 읽고, 친구와 담소도 나누고, 부모도 돌보면서 평화롭게 일상을 영위하는 게 과연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가능할 것인가.

현대문명 사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진정으로 민중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일상의 평화를 잘 누리려면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는 안 될 것이라는 확신이 최근의 경제위기를 보며 들었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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