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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를 쓰레기통에 던지다
번역서를 쓰레기통에 던지다
  • 장은주 서평위원/영산대·철학
  • 승인 2008.10.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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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타무스] 책에 대한 증오

학문을 한다는 사람이 마냥 책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많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나의 책에 대한 경험은 썩 좋지만은 않다. 어릴 적부터 이해도 되지 않던 어려운 책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스스로의 지적 능력만 탓하며 던져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기껏해야 소설책 정도 밤새워 신나게 읽은 기억은 있지만, 전반적인 나의 독서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 언론의 화려한 서평을 보고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쓴 책을 기대감을 갖고 사서 읽었다. 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을 싫어하는 편인데, 난해한데다 무슨 문예비평 같은 철학 글 스타일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렇다. 그러나 서평이 너무 좋아 이 책은 작심하고 반나절 이상을 읽었다. 그러나 결국, 진짜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문제는 번역이었다. 원전 비교 같은 것을 안 해 보아도 번역문만 보고 오역 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몇 번씩 읽어도 이해되지 않던 본문들은 엉터리 번역 때문임이 너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책이 출판될 수 있었을까. 도대체 내가 보았던  신문의 서평을 쓴 기자는 책을 한 번 읽기라도 한 것일까.

화도 나고 우리나라 출판계와 언론의 수준이 아직 이 정도구나 싶어 많이 우울했다. 나도 책을 몇 권 번역해 본 적이 있기에, 좋은 번역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번역한 책을 읽으며 내가 그 ‘증오’의 책을 증오했던 식으로 반응했을지 모르겠다. 더러 오역도 있을 터이고, 무엇보다도 어문체계가 전혀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매끄럽게 표현하는 일에 크게 재주가 없어서다. 그래서 나도 한 몫을 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정말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특히 인문사회과학 책을 멀리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엉터리 번역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내가 책에 대해 가진 유쾌하지 못한 경험들은 대부분 번역 때문이었지 싶다.

번역은 본래 반역이라는 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좋은 번역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 자체는 정말 좋은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역자의 역량 같은 것은 문제가 될 것 같다. 깊은 전문성도 없으면서 부업 삼아 하는 번역의 질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번역 문화와 시스템 같은 데 있다. 역자의 역량 문제도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과 본질적으로 연결될 것처럼 보인다. 번역을 제대로 된 연구업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학계의 관행 같은 것에 상투적인 지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말하자면 ‘번역의 공공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한심한 인식 수준이다. 번역서는 기본적으로 공공재다. 번역은 새로운 정보와 사유를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을 깊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좋은 번역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서 번역을 단순한 ‘시장 논리’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번역서는 연구업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돈이 안 된다. 요즘에는 이른바 ‘매절’ 번역 관행이 많이 사라져 가고 인세 계약 체제로 가고 있는 모양인데, 저작권료 지불을 핑계로 출판사에서는 5% 정도의 인세만 주고 번역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서는 시장에서 많이 팔리지 않으니까, 결국 역자에게만 그 부담을 지우겠다는 출판사의, 조금은 치사해 보이는, 전략이다.

그러나 출판사만 탓할 수는 없다. 결국 출판사도 돈 벌어야 하니까. 진짜 문제는 ‘국가’에 있다. 문화와 학술의 공공적 가치를 아는 나라라면 우리의 번역서 시장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최소한 양서에 대해서만큼은 공적 지원을 통해 번역서 출간이 단순한 시장 논리에 좌우되지 않게끔 해야 한다. 최근 들어 학술진흥재단에서 미미하기는 해도 번역에 대한 공적 지원을 시작하기는 했다. 얼마 전 나도 한 권 번역 지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책은 학진과 계약한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판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학진의 지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한 적이 있다. 하여튼 이런 수준이다. 번역에 대한 공적 지원을 하기로 했으면 그 취지에 맞게 해야 될 일인데, 좋은 책이라고 저작권을 미리 사 둔 출판사와 역자는 단지 그 이유로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단다. 선의가 벌을 받는 셈이다. 이 나라가 제발 좀 이런 수준은 이제 좀 극복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장은주 서평위원/영산대·철학

‘ 코기타무스‘ 코너는 서평위원들이 집필하는 북칼럼입니다. 장은주 교수를 시작으로 강진아, 구갑우, 곽차섭, 권성우, 김혜경, 이봉재, 이왕주, 이택광, 홍훈 서평위원의 글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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