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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고전] <24>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우리시대의 고전] <24>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 이봉재 / 서울산업대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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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7:41:15
이봉재 / 서울산업대·과학철학

서구 근대과학의 전통은 감히 인류 최고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작용이 없지 않지만, 과학이야말로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전형이며,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과학의 전통에 의해서만 삶과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해갈 수 있다는 희망이 견지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특별한 지식유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너무나 특별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과학을 가능케 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것은 통상 ‘방법’이라고 불리며, 실증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듯 경험과 논리에만 충실함으로써 인간적 오류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방법’에 충실한 연구자 개개인들이 획득한 진리들이 축적됨으로써 진보하는 것, 그것이 토마스 쿤 이전의 일반적인 과학관이었다.

연구자 공동체의 집합적 작업

20세기 과학학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사의 검토를 통해 이러한 과학상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쿤은 ‘패러다임’ ‘과학혁명’ 등의 개념을 통해 과학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주는데, 거기서 과학은 더 이상 개인적 작업이 아니다. 주제·연구방식·답의 유형 등에 대한 일련의 합의를 공유하는 연구자 공동체의 집합적 작업으로 이해되며, 과학의 역사 또한 진리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적 이행’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종교적 개종에 비유되는 ‘혁명적 이행’의 과학사는 첨단의 이론을 향한 축적적 계승의 역사로 나타나는 과학교과서의 관점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기된다. 패러다임들 간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상이한 패러다임에 속하는 과학자들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의 탐구가 패러다임이라는 형이상학적·방법론적 전제들에 기반하여 이뤄진다면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교정해간다는 과학의 특성은 어떻게 이해돼야 하는가, 또한 이제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되며,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과학들을 하나의 통일된 학문영역으로 묶어낼 ‘과학성’의 정의는 가능한가 등.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어쨌든 쿤의 관점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쿤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진리·지식에 대해 이른바 포스트 모던한 관점을 내용있게 확보하게 된다. 진리·지식은 더 이상 역사초월적인 타당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패러다임에 따라 급변하는 것으로서의 지식이 역사와 무관히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 함께 과학지식에 대한 역사적·사회과학적 연구 또한 재평가된다. 쿤 이전 그러한 연구들은 과학의 ‘외적’ 측면에 대한 부수적인 연구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것들은 과학인식론의 합당한 연구영역으로 존중받는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과학지식사회학은 그런 깨달음의 소산이다.

간단히 말해서 쿤을 통해 우리는 역사·사회가 과학에 대해 개입하는 양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쿤의 관점을 따른다면 이제 과학은 ‘특별한’ 것이 아닌가. 인간역사의 모든 것처럼 우연과 열정, 오류에 의해 요동치는 그런 것일 뿐인가. 상식이나 미신, 철학과 특별히 구분될 수 없는 것인가.

객관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다

그런 과장스러운 해석들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과학에 대해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쿤의 생각에도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쿤에게 자연과학이라는 특별한 지적 성취는 전혀 의심받지 않는다. 쿤은 다만 과학의 탁월함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종래 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과학에 대한 인식론적 정당화가 과장이자 단순화이며, 그들이 견지했던 과학적 객관성의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쿤 이전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자의 개성이나 과학자 집단의 공유된 신념들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상정됐다.
그런 객관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으며, 과학의 탁월함을 위해서는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이 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쿤에 의하여 과학은 경멸받지 않는다. 그 깊이를 재조명받을 뿐이다.

토마스 쿤(1922∼1996)

토마스 쿤(Thomas S. Kuhn)은 1922년 6월 미국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1943년 하버드대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수석 졸업했고, 1949년에는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대 조교수를 거치며 버클리대,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MIT대 등에서 과학사를 강의했다. 그의 저서로는 대표작 ‘과학혁명의 구조’(1962) 이외에도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 ‘주요한 긴장’(1977), ‘흑체이론과 양자 불연속성’(1978) 등이 있다. 1996년 6월 17일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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