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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⑩ 國政監査와 判定勝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⑩ 國政監査와 判定勝
  • 교수신문
  • 승인 2008.10.0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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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나나 共和國
 
 1979年 10月 나는 서울에 나와 있었다. 김재규가 말했듯 維新의 심장이 멎었을 때
모두 내게 인사를 했다, 이제 학교를 바로 잡을 수 있겠다고. 그런데 그 해 12월12일 밤 같이 있던 金末龍 씨가 지금 이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이 있는 것일지 전혀 파악을 못했으나, 뭔가 不吉한 생각은 들었다. 지금은 作故한 金末龍씨는 노동운동가로 나중에 國會 勞動委員이 되었는데, 나와 같이 也靑先生記念事業會 發起人의 한 사람이었다. 金大中씨와 친분이 있는 모양으로 매번 나를 만날 때면 그 분한테 靑丘大學 얘기 잘 해놨다고  안심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일어난 일 때문에 나는 또 十數年을 기다리게 되고, 다음 해 1980年에 이 민족은 다시한번 同族慘劇을 光州에서 겪고, 軍人政權이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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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미국 國務省에서 발행한, 한국을 소개하는 어느 冊子에 南美의 ‘바나나 共和國’에 比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과연 댓구를 못하겠구나 싶었다. ‘바나나 共和國’ 이란 高級將校들끼리 번갈아가며 해먹는 南美의 共和國들을 말한다. 그 국가를 卑下하고 民度를 嘲弄하는 語感은 듣는 그대로다. 1987년 6월에도 나는 미국에서 나와 있어, 6月의 市民抗爭이  정부의 6·29 降服宣言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목격했다. 그 해 12月에 있은 兩 金과 盧泰愚의 三巴戰에서 이제는 朴正熙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이 손에 닿을 듯 했건만, 兩 金이 다투는 바람에 盧씨에게 漁父之利를 내주고 말았다. 나는 그때 兩 金 中의 하나가 양보하면 그 사람이 장차 큰兄이 된다고 믿고, 金末龍씨에게 金大中씨가 그 큰兄이 되기를 勸하도록 애타게 力說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지금 兩 金이 갈라져 있음으로해서 大中씨에게는 得票上 더 유리하다는 理論을 말하니, 내게는 도무지 納得이 안 갔다. 훗날 金大中씨 자신이 TV에서든가 그때의 잘못을 告白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하여튼 나로 봐서는 이름이라도 ‘文民政府’가 들어설 때까지 또 헛된 세월의 延長이었다. 지금은 選擧過程에서 賂物去來 하나만 있어도 選擧된 後에 罷免당하는 事例를 신문지상에서 읽는 세상이지마는, 그 때는 行政部處가 統班長을 買收하여 庶民投票를 操作하는 것을 신문은 “組織力이 强해서 盧씨가 이길 것이라“고 표현하는 시대였다. 나는 也靑先生이 下世하신 10周年이 되는 1987년 이 해, 遺稿를 編輯하여 『靑丘有言』이란 小冊子에 담아 출판하고 要路에 配布했다.

(2) 國政監査

 한 편 正義를 부르짖는 民衆運動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어, 이듬 해, 1988년 10월 18日 영남대학교는 드디어 國政監査의 도마에 올랐다. 여기에서 옳은 말은 거의 다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말들을 모아보면:

 “示達을 받고 당황했습니다. 私立大學이 監査를 받는가하고……”(권혁기 總長署理)
 “私立大學으로서 國政監査의 對象이 된 것이 疑問스럽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최각규 文公委員)
 “公立도 아닌 私立大學을 選定케 된 것은 嶺南大學 設立當時의 正統性 문제부터 시   작해서 현재까지 학교의 運營狀態가 너무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현직 大統領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이용하여 대학을 만들었다는 것.勿論 容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김동영 文公委員)
 “大邱大學과 靑丘大學을 强壓에 의한 방법으로 통합하고, 權力을 利用해서 다시
 大統領이 이 학교를 强奪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박관용 文公委員)
 “5·16 이후 朴正熙 大統領의 周圍사람들이 大邱大와 靑丘大를 합해 嶺南大學을 만들어, 隱退한 後 이것을 맡아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해서 사실상 强制로 이 사람들한테 抛棄覺書를 쓰게하여 만든 대학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동영 文公委員)
 “이것이야말로 維新의 殘滓이고……“(박석무 文公委員)
 “지금 論難이 되고 있는 日海財團이 다 같은 類型일 것입니다. 이러한 遺産을 淸算하는 것이 우리가 逢着하고 있는 일차적 과제입니다.” (이종찬 文公委員)
 “大邱大學을 慶州의 崔浚 先生님이…… 靑丘大學은 崔海淸 先生님이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이 設立한 趣旨는 愛國的인 立場이었는데…… (김동영 文公委員)
 “大學의 문제를 대학이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民主發展뿐 아니라, 앞날이 暗澹합니다.”(이상회 文公委員)
 “民主化時代에 들어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學園이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일입니다.”(박관용 文公委員)
 “嶺南大문제는…… 뜻있는 모든 國民들이 注視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 學校의 그늘 밑에서 자기의 生存權을 維持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敎育의 百年大計를 위해서 試金石이라고 봅니다.……이제 이 學校는 名譽를 回復해야합니다. 이 學校의 卒業生, 在學生을 위해서도…… 오히려 늦었습니다. 아무리 이 學校가 잘 하려고 몸부림쳐도 周圍만 맴도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根本的으로 化學的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 (손주항 文公委員)
 “換骨奪胎하는 大手術을 加 해주십시오.” (이상회 文公委員)
        “억울한 사람이 없고, 그늘진 곳이 없게끔……” (김동영 文公委員)
 “嶺南大學이 發展해나가는데는 뭔가 아픔이 隨伴되어야 안 하겠나 하는 점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권혁기 總長署理)

 지금 얘기를 한들 이 以上 할 수는 없을 것이다.  學園의 自律性,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등은, 지금 들어도 斬新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 때 비유된 日海財團이 지금도 말썽으로 남아 있는 현실은 그 동안 세월의 흐름을 無色케 한다. 卽,  구호만 무성한데 알맹이는 빈약한 그 동안 民主發展의 縮小版을 보는 듯도 하는 것이다. “軍事쿠데타 以後의 不正, 不法, 不合理를 파헤치”(김동영)는 데는 아직 序論段階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구체적이 못되고 추상적이며, 因循姑息하여 실천은 回避하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 사람들은 곧잘 진실은 외면하고, 糊塗하기에 바쁘기가 일수다.

 

처음부터 “私立大學이 왜 國政監査의 對象이 되느냐”고 반발하는 학교 당국자들은 私立大學이 왜 大統領學校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다. 대학의 企劃室長은 학교의 原 設立者가 누구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叱責을 받더니, 다음에 한다는 말이 “大邱大學 初代 理事長은 崔浚씨이고, 靑丘大學은 崔海淸씨입니다.”고 한다. 設立者는 의례히 理事長이라고 동일시하고 있는 모양인데, 設立者에 가서는 정답을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靑丘大學의 厄運은 設立者가 理事長 자리를 同時에 차지하지 않고 남에게 준데서 비롯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막 설립한 학교를 개척해나가기 위하여 CEO, 즉 學長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理事長 자리를 받은 사람이 그 名儀를 奇貨로 設立者 몰래 “팔아먹은” 것이다. 아니면, 法이 靑丘大學같은 경우를 위하여 설립자의 자리매김을 分明히 해놓지 않은 法的인 缺陷이라 해야 할까. 즉 학교설립에 財物을 얼마나 出捐했느냐는 것 以外에 意志와 精力과 努力의 出捐에 대해서는 法은 깡그리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본 靑丘大學 進上 「覺書」에 理事長 자리를 비워 논 것은 설립자를 의식한 것이었던가고 心證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설립자뿐 아니라, 理事長의 署名捺印도 없는 文書가 되어 그 效力도 문제삼아야한다. 다른 한편, 財物出捐에 대해서도 也靑은 平地에서 창업하여 1966年 당시 時價로 20餘億의 재산은 일궈 놨다고 자부한 말도 되풀이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靑丘大學의 負債도 嶺大의 學校敷地도 靑大의 文化洞, 其他 校舍를 매각하여 충당한 것도 위에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文化洞 校舍는 시민을 위한 ‘文化센터’로 기획하던 건물로 설립자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이 監査에서 당시 嶺大 理事長이 “嶺南大學의 母體는 大邱大學과 靑丘大學인데,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설립에는 瑕疵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 한 것이 눈에 띄는데,
그러면 내부적인 瑕疵는 있었다고 ?認하는 口套다. 그가 만약 우리가 보아온 經緯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겉으로 나타난” 瑕疵도 否認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런데 지식이란 때로는 매우 불편한 물건이기도 하다. 내가 往年에 이 理事長을 尋訪하여 질문을 하려하니, 일관하여 記憶喪失을 호소했다. 그러나 監査場에서는 “私立學校는 私立學校로서 特性이 있기 때문에 嶺南大學이 國家에 歸屬하는 것은 反對”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한 國政監査가 없었는 듯 지나가니, 이 나라의 民主時間은 섰다, 갔다 하는 고장난 시계같기도 하다.  그러나 表出한 말들은 기록에 남아있고, 國政監査라는 里程標的 價値는 지우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말의 씨를 심어놨다고는 할 수 있다. 씨는 언젠가는 싹을 틔운다.

 나는 監査班 여러분에게 感謝兼 다음과 같은 書信을 보냈다:
                              

<國會文公委員會 監査班 各位 貴下>

 昨年 6·29 로 비롯한 民主化 氣運의 勝利를 어떤 사람들은 또 하나 주어진 歷史의 轉變이라 看做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오랜 忍苦와 鬪爭 끝에 마땅히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면, 靑丘大學의 緣故者로서 필자는 확실히 後者에 속합니다.

 다만, 私憤과 公義를 품에 안고 70年代 民主守護의 隊列에서 싸우시던 設立者께서 오늘을 못보신채, 77年에 他界하셨음이 원통할 뿐입니다. 그 분이야말로 이번 嶺南大學 監査를 맨 앞자리에서 지켜보시고, 여러분께 感謝하실 분이었습니다. 지금 幽明은 달리하나,
여러분의 義擧를 보시고 靈이라도 必是 느끼는 바 있으실 터이니, 그를 대신하여 不肖자식
이 정성모아 감사의 뜻을 表하는 바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민족의 恨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마는, 개인의 恨을 풀어주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크나큰 겨레의 恨도 필경은 개인의 恨이 모인 것이고, 자그마한 매듭이 풀림으로써 큰 매듭도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靑丘의 恨을 집안의 원한으로만이 아니라, 겨레 전체의 비운의 一環으로 보고, 그 해결도 大局的 事必歸正에 기대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序頭가 필요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오늘 執筆의 動機는 往年의 所謂 嶺南統合의 經緯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리고저……몇가지 資料를 보내드리고저 합니다.……

 資料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앞으로 問議하실 일이 있으시면 기꺼이 應答함은 勿論, 그런 機會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區區한 靑丘大學의 事緣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우리 나라의 將來를 위하여 지금 여러분이 막 시작하신 일들이 徹底히 遂行되어 結實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서 靑丘大學 校庭에 아로새긴 標語와 같이(지금은 소위 嶺南大學 校庭에 있슴) 우리 모두 「새 歷史의 創造者」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1988年  11月

                                 
 “지금 여러분이 막 시작하신 일”이란 勿論 民主革新運動을 뜻했다. 그러나 文公委 各位로부터  우편물을 받았다는 소식은 하나도 받아 보질 못했다.
 
 國政監査를 치른 後 嶺大는 벌집을 쑤셔논듯 혼란 상태를 드러냈다. 監査에서 들은 峻嚴한 訓戒는 하나도 구성원들에게 수용이 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道義的 의미를 체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每日新聞에 寄稿했다:

                              
<問題의 混亂은 問題의 回避에서 온다>
 -- 所謂 嶺南大學 事態를 보고 -- (每日新聞 1988 12/3)

 요즘 신문은 소위 嶺南大學事態를 말하여 “空中分解의 危機”란 極端的 表現을 삼가지 않고 있으니, 그 混亂狀態를 可以 짐작할 수 있겠다.……이 鄕土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학교의 由來에 대하여 조금은 남달리 아는 바 있는 사람으로서 垂手傍觀만 하기에 너무나 안타까워 붓을 들었다.
 무릇 문제의 혼란은 문제의 소재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간에 회피하려 할 때  尤甚하다.
 문제는 이번 國會特委이 監査에서 그 大學은 “現職 大統領이 권력을 휘두르고, 그 주위의 아첨輩들이 大邱大, 靑丘大 설립자들로부터 학교를 강제로 抛棄하게하여” 설립하게된 것이라 명백히 公言함으로써 터졌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과거 20년 동안 보편된 지식으로, 그 밖의 많은 지식과 같이, 그 동안 非理의 治下에서 알면서도 緘口하고 가슴에 접어 둔 지식이었다. 이 문제의 比重으로 말하면, 不正入學이나, 區區한 人事問題는 枝葉末梢의 일이다. 그런데도 학교의 관계 인사들은 문제의 핵심은 故意로 回避 乃至 흐리게하고, 理事陣改編, 人事問題등에만 甲論乙駁하고 있다.……大學設立의 大前提가 도마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면 理事陣의 사퇴니, 總長의 排斥이니 하는 문제도 擡頭 안했을 것이다.…… 도대체 모두들 民主바람은 왜 불었느냐고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간다.
 학교가 무너진다, 학교를 지킵시다고 당황만 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소재를 똑 바로 볼 일이다. 그것은 國會特委가 지적하고 간 대로, 다름아닌 그 學校統合過程에 있어서의 비리였다. 이것을 바로 파악하였다면, 그 非理의 統合을 이룬 권력의 緣故者와 被害者의 緣故者를 混沌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嶺南大學의 前身 두 학교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물건이 아니었다. 赤手空拳으로 無에서 有를 이루고, 피땀어린 辛苦를 기울여 育成한 어느 設立者의 功이 있고, 어느 집 대대로 이어 온 가산을 喜捨하여 비로소 그 두 대학은 태어나고,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지금 嶺南大學의 관계자들은 하나의 주인 없는 拾得物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학교란 물론 사회의 公器다. ……그렇다고 해서 報酬없이 奉仕할 교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次元에서, 이 한정된 의미에서 私立大學의 주인은 設立者다. …… 교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직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설립자는 죽든, 살든 그 자리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强奪’이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
 强奪에서 비롯하여 학교의 정통성이 상실됐다면, 奪還後에는 마땅히 그 주인을 찾음으로해서 그 정통성과 道義性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으로 봐서는 大統領에게 强奪을 當했거나, 또 무슨 이름으로 當하거나 강탈은 마찬가지다.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준다해서 이미 통합된 학교를 分割하는 것은 아니다. ‘觀念上’
그 학교를 강탈이전의 상태로 환원시키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현 상태에 이른 것처럼 看做하고 處理하자는 것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해자에게는 公平을 돌려주고, 학교는 지난 20년동안 꼬리표 같이 따라다니던 陋名을 拂拭하자는 것이다. 兩大學은 강탈이전에도 자체간에 통합을 위한 相議가 있었다.
 사람은 집을 한 칸 지어도 告祀를 지내고 입주하는 것은 그 공간을 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사이 그 학교는 남의 원한위에 눌러 앉아 있었다. 정통성의 문제는 공개된 비밀이었다. 그러고도 무사태평을 비는가. 무엇보다 교육의 場으로서 학생들에게 정신적으로 淨潔한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그 동안 이 고장은 겨레의 民主歷史에 不美로운 이름을 잇따라 輩出함으로써, 우리나라 안에서도 社會心理의 健全性에 가장 피해를 입은 곳이다. 이 餘毒을 지금 嶺南大學의 混亂狀態에서 보는 듯하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方正한 마음으로 여기에 접근하는 것만이 그 학교의 ‘空中分解’를 避하는 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鄕土의 건전한 기풍도 도로 찾고, 이 고장 전통의 義理와 氣槪도 돌이켜야 한다.…… (밑줄 添加)
                         

 1987년에 也靑의 遺稿를 土臺로 『靑丘有言』을 엮어 世間에 알리고, 이번에는
日記, 便紙, <靑丘春秋(大學新聞)> 寄稿文등을 추려서 『靑丘證言』이라 이름을 부쳐서 출판을 하니, 1997年, 마침 故人의 20週忌年 행사가 되었다. 어느 책방에 들어가서 이 책을 찾다가, 占術, 命理, 讖言 類의 책들 속에 끼워논 것을 보고 苦笑했다. 靑丘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땅의 古代 雅名이다. 책방에서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占치는 책쯤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靑丘가 겪는 운명이 과연 우리나라의 그것만큼이나 억울하고, 崎嶇하긴 하다 싶으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위해서라도 靑丘의 좋은 결말을 祈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외람된 생각도 해본다.    

 1998年 12月 17日 저녁에는 「靑丘大學開校50週年」記念行事를 조촐하게나마 치렀다. 1948年 11月 <大邱文理專門學校>, 俗稱 <夜間大學>으로 發足한 것을 每年 11月, 12月 사이에 記念行事를 해 오던 터이다. 來賓中에는 10年前 嶺南大學의 國政監査 監査員의 한 사람이던 孫周恒 前國會議員이 먼 길을 와서 寄附까지 해주어 특히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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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식 2008-10-07 14:26:16
市民을 위한 "文化센타" 를 꾸미려던 文化洞 교사는 국세청-大宇건물-Migliore 를 거쳐 지금은 Novotel 이란 호텔이 돼 있는데, 그 앞뜨락을 장식하는 靑丘大學 옛터기념 碑石. 2001 년 Migliore 를 지으면서 세워졌다 - 최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