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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층, 기억의 이름들
시간의 지층, 기억의 이름들
  • 배원정 기자
  • 승인 2008.09.02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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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진 60년 1948-2008展|10.26까지|국립현대미술관

구본창(1953-), ‘태초에 10-1’, 177x480cm, 인화지에 사진(흑백)·면천·실·재봉, 1995.

한국을 담은 매그넘의 사진을 보기위해 13만 명이란 관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사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찾기 위한 관객과 컬렉터들의 타는 목마름은 한껏 달아오른 사진 붐에 열기를 더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진이 시작된 지 60여년이 흐른 지금, 사진에 대한 뜨거운 관심만큼이나 한국의 사진이 갖고 있는 독자적인 미학과 정통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묻을 시점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한국현대사진의 역사와 과정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어 주목된다.

오는 10월 26일까지 열리는 ‘한국현대사진 60년 1948-2008’展에는 한국사진 60년史를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게끔 한국의 대표적 사진작가 106명의 작품 380여점이 전시됐다. 전시장을 다 돌아보는데만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야말로 초대형 전시다. 이추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사진계 원로 및 전문가로 구성된 외부 운영위원회와 공동으로 작가를 선정했다”고 설명한다. 외부 운영위원으로는 김영수 민족사진가협회장과 정범태 작가, 양성철 대구산업정보대 교수, 오상조 광주대 교수, 최민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박영택 경기대 교수가 구성됐다. 최민 교수는 “작가 대부분이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작품을 직접 골라 출품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총 세 부분으로 구성했다. 초기 한국 현대사진의 태동을 감상할 수 있는 1948년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과, 한국 사진의 위상을 정립한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대표적 사진들, 마지막으로 다양한 실험과 창작활동으로 사진의 영역이 확장된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작품들이 역사적 흐름을 바탕으로 총 망라된 것.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승훈 학예연구실장은 “한국 현대사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시가 없었던 만큼, 한국 사진을 시대적으로 훑어나가면서 사진예술계의 분출하는 창작력과 다양한 시각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비중을 뒀다”고 말했다. 

임응식(1912-2001), ‘전쟁고아’, 43x27cm, 인화지에 흑백, 1950.
‘한국현대사진 1948-1960’(제2전시실)에서는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 80여점을 만날 수 있다. 6.25 전쟁과 민족 분단, 전후의 극심한 빈곤 등 고난과 극복의 시기를 통해 비극을 목격한 사진가들이 탐미주의에서 벗어나 리얼리즘이라는 물결을 만들어냈던 시기다. 박주석 명지대 교수(사진기록학)는 “당시의 리얼리즘 사진은 대상을 보는 방법이나 의식이 일제 강점기 예술사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급하는 대상이 사회적 혼란기에 고통 받는 인간의 삶으로 바뀐 상태”였다고 말한다.

당시 활동했던 주요 작가와 단체로는 임응식과 新線會(이해문, 한영수, 안종칠, 정범태 등)가 대표적이다. 이들 사진에서 보이는 사회 현실과 서민들의 생생한 삶의 포착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에 충실했던 신선회가 해체된 후 한국 의 리얼리즘 사진은 기록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도 작가의 이념과 주장을 펼치며 리얼리즘 사진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작가로는 주명덕과 현일영, 강운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전시 매체로서의 한국 사진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으며, 기존의 사진 미학을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박 교수는 “1960년대 후반 개발독재가 심화되면서 사진이 공모전 위주의 획일화, 정형화 돼가는 당시 상황을 비교해보면, 1950년대 한국 사진은 우리 사진사의 빛나는 별이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현대사진 1970-1980’ 전시실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작가주의를 완성시킨 작가들의 작품들이 시대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강운구, 배동준, 홍순태, 오상조, 육명심 등의 작품 120여점이 걸렸다. 1950-60년대 사진의 정형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들이 1970년대를 거치면서 대거 배출됐는데 그 중 육명심의 사진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박평종 명지대 연구원(미학·사진비평)은 “육명심의 사진을 지배하는 요소들인 과감한 클로즈업이나 다각적인 앵글의 구사, 화면의 균형에 구애받지 않고 주제를 강조하는 사선형 구도,

육명심(1933-), ‘1983.5 강원도 강릉’, 40.6x50.8cm,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83.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한 명암효과 등은 당시 고전적인 사진 개념에 비춰보면 매우 낯선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 속에서 1980년대는 김영수, 신복진, 전민조 등이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진을 찍었다. 동시대 작가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김영수는 ‘사람’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소외계층 문제에 눈을 돌렸고, 정동석은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분단문제를 진지하게 들춰내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작가들은 사진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표현방식을 보여줬다. 구본창, 배병우, 김대수, 김장섭 등의 사진은 이전 세대의 사진가들에게는 현대미술의 한 경향으로 간주됐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진과 현대예술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국현대사진 1990-2000’ 실에 들어서면 이전 시대와 달리 칼라 사진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창작활동으로 사진의 영역이 보다 확장된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사진학)는 “1990년대 미술은 미술과 키치적 감수성, 그리고 이미지를 활용한 미술이 강력한 조류를 형성하면서 미술 개념 자체가 변질되거나, 그 위상의 급격한 변화가 초래된 시기였다”고 정의한다. 구본창, 김중만, 배병우 등 우리 귀에도 친숙한 작가들의 작품 17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은 여러 매체를 혼합하고 기존의 사진 개념을 파괴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실험을 주도했다. 특히 대규모 사진전과 각종 수상제도, 전시공간의 다양화 등에 힘입어 국내외적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띈다. 김아타, 김상길, 정연두, 윤정미 등은 2000년대에 개별화된 생존 전략의 예를 보여 주는 작가들이다.

경계에서 작업하는 현대사진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과 재현의 수단을 넘어 새롭고 도전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고 있다. 박영택 교수는 “이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고 말한다. 따라서 “객관적 증거, 기계적 기록 장치라는 카메라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깨지게 됐다”고 주장한다.

김아타(1956-), ‘온에어 프로젝트 055-2’, 168x225cm, 크롬제닉 프린트, 2004.

사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와 상징이 무너지고 기존의 장르 개념이 모호해진 상황에서 신예작가들은 딱히 ‘미술’을 하는 것도, ‘사진’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닌 그들의 작업을 그저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수진 사진평론가(사진심리학)는 “일상, 현실, 관계, 공간, 역할과 같은 소재는 이전 세대와 동일하나, 그들은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일정한 거리를 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사진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 사진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전 세대와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관심사와 전략을 구사할 뿐 아니라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작가군을 이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그것이 사진이란 장르가 비로소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예술 매체가 됐다는 것의 방증일 수도 있다는 논리다.

나라마다 사진이 미학적 가치가 담겨 있는 예술로 인정받기까지 사진의 역사는 서로 다른 발전과정을 겪어왔다. 박주석 교수는 “사진을 미학적 가치로 보지 않고 미술적 안목에서만 평가하려는 시도들은 우리 사진이 갖고 있는 독자적인 미학체계를 완성하는데 방해요소만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사진이 기록물에서부터 현대예술의 한 장르로 편입되기까지 한국 사진사를 빛낸 작가들의 작품 4백여 점을 보면서 관객들은 무얼 찾아내고, 어떤 의미를 생산해 낼지 자못 궁금하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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