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8:30 (금)
호남 남종화의 근원을 만나다
호남 남종화의 근원을 만나다
  • 배원정 기자
  • 승인 2008.08.25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小癡 許鍊 탄생 2백주년 기념전

추사를 흠모한 소치, 스승의 그늘에 안주한 것일까. 소치의 일관된 예술정신에 담긴 진면목은 재평가 필요하다  

소치 허련(1808~1893)이 탄생한지 2백년을 맞았다. 장승업(1843~1897)과 함께 19세기 조선화단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주목받는 소치는 현재까지도 호남지방에서 그 藝脈을 이어오는 남종화의 근원이다.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물게 현존하는 작품수가 많고 자서전인 『小癡實錄』을 전하고 있어 한국회화사 뿐만 아니라 19세기 문화사 연구에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소치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와 학술세미나가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에서 이달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소치의 다양한 작품 150여점이 전시돼 주목된다.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극적이다. 오직 그림재주 하나로 19세기 문화계를 주름잡는 유명인사가 되기까지 그가 살았던 삶의 여정이 그렇다. 허련은 당시 제주도와 함께 유배지로 유명했던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그림을 독학했다. 그러던 중 당대 유명한 학승이었던 초의선사의 도움으로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를 익힌 후, 추사 김정희를 만났다. 훗날 추사로부터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그의 화격은 높이 평가받았다. 헌종 앞에서 임금이 건넨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려 바칠 정도였으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치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남종화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남종화란 명·청대 중국 문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조선에서는 김정희를 선두로 그들 일파에 의해 유행하고 토착화 됐다. 허련이 남종화에 심취하게 된 것 역시 김정희의 영향과 사대부 지향적인 가치관 때문으로 여겨진다. 소치 전문가인 김상엽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관은 “몰락한 명문의 후손으로서 갖는 관념적 사대부 취향이 김정희에 의해 심화됐고, 지방인으로서 갖는 ‘문화적 소외의식과 극복’이 그의 일생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의 사대부 지향적인 의식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 그림으로 서울대박물관 소장 ‘선면산수도’가 있다. 그림의 여백 가득, 중국 唐庚의 「山靜日長」 전문이 추사체로 써 있다. 「산정일장」은 높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선비가 자연의 품에 안겨 소박한 삶을 즐기며 늙어간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소치 특유의 까실하고 메마른 필치가 글과 한데 어우러져 감흥을 고취시킨다. 은퇴한 선비의 거처를 중심으로 이를 품어주는 너그러운 자연이 화면 가득히 묘사됐고, 화면 왼쪽에 은거지로 돌아가는 늙은 선비의 모습이 긴장감 있는 필선으로 표현됐다. 청색과 갈색으로 채색한 단정하고 맑은 느낌의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김상엽 감정관은 “유교적 소양을 닦고, 경전을 읽으며 글을 쓰는 일을 일상사로 여겼던 여항문인적 사유체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허련은 그가 추구했던 회화적 지향점을 이러한 문인화풍으로 표출하며, 흥선대원군, 고위 관료 권돈인, 무인 출신 신관호,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김흥근 등 쟁쟁한 명사들의 후원 속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마음껏 펼쳐나갔다.

허련은 여러 방면에 두루 능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특히 산수화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윤영돈 소장의 ‘산수도’는 잘 짜여진 구도와 자연스런 채색, 활달한 붓선이 만들어낸 수작이다. 화첩이나 병풍 등 소품을 많이 제작했던 허련의 그림으로는 보기 드문 대작이기도 하다.  원경과 중경, 근경이 다 갖춰져 있으면서도 대상에 세밀한 필치가 경쾌하면서도 안정감 있게 그려졌다. 중경의 둔덕, 집, 버드나무의 섬세한 묘사들은 근경과 함께 두 군데로 초점을 나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 아래로 오가게 한다. 먹의 선염과 엷은 색채의 자연스런 표현은 그림의 격조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허련의 이와 같은 화풍은  대부분 추사의 회화관을 받들어 제작된 것인데, 이번 국립광주박물관 전시에 추사와 소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처음으로 선보였으니 이목을 끌 수밖에.

「阮堂蘭話」라는 이 작품은 김정희의 난 그리는 법에 관한 글을 허련이 필사한 것이다. 이 첩은 글씨를 쓰고 있는 추사를 그린 인물상과, 본문과 허련의 발문, 그리고 산수화가 그려진 4부분으로 구성됐다. 이 중 앞의 ‘인물상’은 「완당난화」의 주인공인 추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화로와 주전자, 청나라의 경학과 금석고증학의 새로운 성과를 담고 있는 채색 포갑의 중국 서적, 중국식 탁자와 화문석 등은 19세기 추사의 문화성향과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그림의 상단 왼쪽에 보이는 매화와 수선은 각각 매화를 잘 그린 허련과 「水仙花賦」를 쓴 추사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또 마지막 장의 ‘산수도’에 보이는 배 위의 두 사람은 추사와 소치를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데 김 감정관은 “점잖게 앉아 있는 사람이 추사를 나타낸 것이고,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가 소치로 짐작된다”며, “추사의 일상과 언저리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그림으로 허련에 대한 김정희의 사랑과 스승에 대한 허련의 존경심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추사의 영향으로 남종화에 평생을 바쳤던 소치지만, 그는 ‘許牡蘭’이라고 불리울 만큼 모란 그림에도 뛰어났다. 여러 관직과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폭넓게 교유한 허련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고, 동양에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 그들의 욕망과 문사적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주요 작품 소재로 다뤄졌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채씨효행도’는 소치가 서사적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능력도 뛰어났음을 알려주는데 미술사와 민속학적 중요성이 큰 작품으로 밝혀져 흥미롭다. 이 작품 마지막 장면에는 “부친이 돌아간 후 기일을 맞아 돌아오게 됐는데 비바람이 몰아쳐 갈 수 없게 되자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불의 인도로 제사에 임할 수 있었다”는 채씨 채홍념의 효행을 기린 내용이 묘사돼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나라 그림 가운데 최초로 도깨비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도깨비 형상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소치는 이제까지 김정희에 의해 선도된 문인화 사상과 경향을 익히고 실행했던 면모만 부각돼 ‘추사의 애제자’ 정도로만 인식돼 오던 측면이 있었다. 지난해 추사 김정희 150 주기에서 거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이 그를 추모하기 위한 전시와 학술대회를 마련했던 전례를 돌이켜보면, 올해 소치 탄생 2백주년은 예상외로 썰렁하기 그지없다. 조선 후기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시대가 마감되고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19세기 전반, 오로지 남종화만을 추구하며 서화계의 산 증인으로 살다간 허련의 화풍과 작품세계가 2백주년을 계기로 그 진면목이 재조명 될지 주목된다.

사진제공: 국립광주박물관·호암미술관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