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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기자로 산다는 것
[특강] 기자로 산다는 것
  • 교수신문
  • 승인 2008.07.2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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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경향신문 선임기자

 

기자로 산다는 것


김학순 (경향신문)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한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던 르네 데카르   트의 명언을 패러디한 것 같지요. ‘기호학과 해석’ ‘서사의 본    질’의 저자이자 비교문학자인 로버트 숄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    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생산한 텍스트이다.”



 기자야말로 데리다나 숄즈의 말에 꼭 맞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만 얘기해야 한다고 하지요. 기자는 기사로, 판사는 판결문으로 평가받아야한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의 선구자 조셉 퓰리처는 기자를 ‘국가라는 배를 지키는 파수꾼’에 비유할 만큼 중요한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체계적인 언론인 육성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많은 언론인들이나 학자들이 대학에서의 언론학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때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2백50만 달러라는 거금을 기부해 언론대학원을 설립했습니다. 1912년의 일입니다. 언론인 교육의 제도화를 정착시킨 것은 퓰리처의 공이 지대합니다. 유명한 퓰리처상위원회가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에 설치돼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퓰리처는 기자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투쟁하라.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 항상 모든 당파의 선동가들과 싸우라.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 항상 특권 계층과 공공재산의 약탈에 반대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항상 대중의 복지에 헌신하라.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항상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에 의한 것이건 약탈적인 빈곤에 의한 것이건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걸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퓰리처 얘기를 장황하게 언급하는 것은 제가 20년 전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기자라는 직업에는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기자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를 빼고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언론인 빌 모이어스는 그래서 기자를 ‘희한한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대통령도, 거지도 만날 수 있는 것이 기자라고 하지요.



 기자가 나쁜 점을 꼽으라면 달력의 빨간 날에도 대부분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수 있을 겁니다. 저명한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가 그랬지요. 가족, 친구, 건강 셋만 버리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가 역설적으로 한 말입니다. 제임스 레스턴도 “워싱턴에서는 기자로서 퓰리처상을 받고 동시에 ‘올해의 아버지’로도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였습니다만,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두 아이 모두 기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유를 물었지요. 기자는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는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항상 새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어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허구한 날 일만 하는 아버지보다 잘 놀아주는 이모부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 것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자들에게 일자리는 앞으로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의 하향세를 거론하기도 합니다만 방송, 통신, 인터넷 신문 등 기자를 필요로 하는 미디어는 늘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전망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책에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길 원한다고 너무나 뻔한 모범답안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기자라는 직업의 장점과 매력 때문입니다. 여든 살이 넘어서까지 백악관을 출입한 헬렌 토머스 같은 현장 기자로 남아 있는 것이 소원입니다. 물론 그런 소망을 이루기엔 한국 언론의 현실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직업도 그렇겠지만 기자야말로 직업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이 땅에서 진실을 지키는 보루가 돼야한다고 믿습니다. 기자는 때때로 본의든 아니든 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할 때도 없지 않습니다. 진실 추구가 언론의 첫 번째 책무라면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론과 기자에게 진실은 사람에게 산소와 자유 같은 존재입니다. 평소에는 그리 긴요하게 느끼지 않을지 모르나 부족하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자로서 제 나름의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권력을 견제하는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권력도 견제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착한 권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권은 물론 지성의 전당인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와 언론은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이 권력과 건전한 갈등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언론의 존립 근거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기자와 언론도 ‘언론권력’이라는 외부의 비판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어떤 상처도 펜이 준 상처만큼 깊고 아픈 것은 없다고 합니다. 기자는 권력을 견제하는 대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약손이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공정성 콤플렉스에서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장 큰 숙제의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공정성이라는 화두는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시원하게 해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숙제를 풀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가능성이 큽니다.



 공정성 문제에서 가장 큰 고민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공정성이냐 입니다. 언론은 수시로 공정보도 시비에 휘말리지만 언론이 독립적이기 위해서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선진국에서도 정설입니다. 더구나 기계적 중립성은 허구입니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대표 집필한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라는 책을 보면 미국 언론인들의 대부분이 공정성과 균형성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데 의견일치가 사실상 이뤄졌다고 합니다. 언론인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중립성보다 영혼과 정신의 독립성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성보다 신뢰성이 더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제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언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기자의 글쓰기는 ‘세상 치유하기’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언론과 교육이 사회 변화의 중추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자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분노할 줄 아는 가슴을 지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노할 줄 모르는 지성은 이미 지성이 아닙니다. 분노하기를 포기하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송건호 선생이 훌륭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고 했던 말입니다. 처음엔 송 선생 정도면 좀 거창한 덕목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호기심을 들먹이는가 생각했지요.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호기심이 많지 않으면 참신한 기사를 쓰기 어렵지요.



 대부분의 기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자 유혹은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뉴욕 타임스의 대기자 제임스 레스턴도 그걸 지적했습니다. 취재는 ‘우둔한 어린 아이의 수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기자는 질문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 직업인입니다. 유능한 기자는 질문하는 법을 끊임없이 익혀야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 한국에 오는 사람에게 공항에서부터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 어떠냐고 묻는 기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본기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기자들의 행태입니다.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문성을 갖춘 독자나 시청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어볼 수 있는 양질의 취재원을 많이 만들어야 유능한 언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취재원과의 관계는 단순히 업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소득이 많아집니다.



 앞서 얘기했습니다만 기자는 글로서 승부하는 직업입니다. 기자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글(기사)이라면 독자들은 더욱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기사를 써야합니다. 퓰리처는 ‘글쓰기 불변의 법칙’이라고 해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1. 무엇을 쓰든 짧게 써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 2. 명료하게 써라. 그러면 이해될 것이다. 3.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기자들에게 현장을 가장 강조하곤 합니다. 현장을 지키지 못하면 생생한 기사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늘 현장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현실에서는 현장을 놓치는 기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현장에 가지 않고 들어서 기사를 쓰는 기자도 있습니다.



 기자는 약간은 배가 고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면 따뜻하고 인간적인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자칫 “시내버스 기본요금이 70원쯤 하지 않나요”라고 답변한 부자 국회의원처럼 되기 십상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의 봅 우드워드가 했던 말도 기억할만합니다. “최고의 저널리즘은 흔히 경영층에 도전하면서 이루어진다.” 특히 사주가 있는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 종신교수인 새뮤얼 프리드먼의 <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라는 책입니다. 이름 없는 지방 신문 기자로 출발해 뉴욕 타임스가 자랑하는 기자이자 명칼럼니스트였던 프리드먼의 저널리즘 입문서입니다. 이 책은 기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자질과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쉽고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언론인 지망생들이 가슴 깊이 새겨둘 만한 명구가 많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기자들이 취재하고 보도한 것의 99퍼센트는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의 1퍼센트에 불과하다.” “당신 어머니가 ‘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해도 일단 확인해 본 뒤에 믿어야 한다.” “만일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경우가 있다면, ‘역시나’가 아닐까를 잠시 의심해보라.” “위대한 저널리즘, 진정한 기자란 고집불통의 ‘나홀로 기자정신’에서 비로소 나온다.” “명쾌할 것, 문법과 포맷에 잘 맞을 것, 군더더기 설명 대신에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보여줄 것-그것이 전부다. 나머지 이런저런 잔소리란 그 3가지의 원칙에 붙어 있는 주석에 불과하다.” “정말 믿기 어려운 팩트를 붙잡겠다는 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리적 진실을 포착하겠다는 것이 기자들만의 전매특허요, 면허증이다.” “기자 활동 전에 유지해온 작은 소속 공동체에 대한 충성서약, 사회적 친소관계나 친인척이란 것이 자기검열을 대신한다는 것은 기자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친구와의 우정, 가족관계가 뒤틀리거나 아주 끊겨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정 피할 수 없다면 그런 아픔을 냉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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