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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현실에 뿌리 둔 고민 통해 해답찾기
[나의 강의시간]현실에 뿌리 둔 고민 통해 해답찾기
  • 강명구/서울대·언론정보학과
  • 승인 2008.06.30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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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려니 갑자기 원고청탁을 받아들인 게 후회가 됐다. 필자가 강의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고 정성을 들였다고 감히 필자 강의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고 나서는가 싶어졌다. 그래도 20여년 강단에서 밥을 얻어먹었으니 그 밥값이나 해야겠다는 위안을 했다. 자랑할 것은 당연히 없고 여전히 강의에 대해 고민사항을 다 같이 나눈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1995년 겨울방학이었다. 봄 학기 개설예정인 ‘비판커뮤니케이션’이란 과목의 강의계획서를 새롭게 짜고 있었다. 너무 이론중심이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현실의 구체적 문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강의내용을 고치고자 했다. 웬걸, 푸코, 하버마스, 윌리암즈 등등 외국이론가의 이론소개를 모두 빼고나니 14주 강의내용이 텅 빈 공백으로 되는 게 아닌가. 한국의 현실로부터 문제를 도출한 연구성과를 강의교재로 찾으려고 해봤더니 3~4주 분량 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연구논문들이 외국의 유명이론을 소개하고 글 끄트머리에 ‘한국언론에 대한 함의’를 첨부하는 정도였다. 2~3년을 겨울방학 때마다 같은 고민을 하다가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찾아낸 해결책은 이렇다. 우선 모든 외국이론을 강의계획서에서 뺐다. 한 학기를 끌고 갈 토론주제를 설정했다. 예를 들면 비판커뮤니케이션 과목에서 학기 전체 강의주제를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로 잡았다. 개인적 수준에서 영어체험 에세이도 쓰고, 왜 우리사회가 영어에 죽고 못 사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집단토론도 했다. 그리고 영어의 문화정치(Politics of English), 문화권력으로서의 영어 등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강의했다.

전통적으로 서울대 사회대 학생들은 추상적 이론공부에 능하다. 거대이론, 거대담론을 잘 아는 학생들이 어깨에 힘도 주고, 수업시간에 발언도 많이 한다. 추상이론을 많이 공부하는 전통은, 약해지기는 했지만, 장점도 많이 있었다. 사회전체의 움직임 바라보면서, 사회 안에 자신을 위치시켜 고민하는 틀거리를 제공해 줬다. 그러나 한꺼풀만 더 들어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질문이나 고민이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국이론을 너무 많이 가르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현실에 뿌리를 둔 고민, 자신이 사는 사회로부터 문제를 도출하고, 해답을 찾아보는 능력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강의노트는 간소하고 토론주제와 관련된 글, 현실로부터 문제를 찾아내고, 해답을 찾아가는 숙제를 발표하고 토론한다. 집단보고서는 최근에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집단으로 보고서나 발표를 시키면 공짜로 먹고 들어가는 학생들이 꼭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기말 보고서가 아니라 학기 초에 관심 있는 연구주제를 선정해서 그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했다. 강의계획서를 만들게 하고, 개별적으로 두 차례 면담을 하고, 강의 일주일 전에는 강의목표, 학생들이 읽을 교재, 강의내용이 담긴 강의노트를 온라인 수업사이트에 올리도록 했다. 학생들이 미리 읽어볼 수 있도록. 보고서보다는 주제강의가 더 어렵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또 한 가지 강의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글쓰기 능력 훈련이다. 서울대 글쓰기 말하기 주임교수를 맡고 있는 직책 탓도 있겠지만, 글쓰는 능력은 사고와 성찰의 깊이를 만드는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여러 차례 글을 쓰게 하고, 가능하면 코멘트를 해서 돌려준다. 학생 수가 많으면 조교의 도움을 받아서. 필자가 가장 많이 하는 코멘트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라는 질문이다. 핵심주장(thesis)이 뭔가를 묻는 질문인데, 학생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질문으로 악평이 나있다. 길게 페이퍼를 썼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아무리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문헌조사를 정리했어도 하고 싶은 주장이 불분명한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강의평가에서 “글쓰기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이다.

반성은 없이 자랑이 된 것 같아 또 부담스럽다. 시간 들인 만큼 강의의 질은 좋아진다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인데, 여전히 강의준비에 시간을 충분히 쓰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강명구/서울대·언론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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