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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제 유감-교수신문 집중진단 ‘학부제 어디로 가고 있나’를 보고
학부제 유감-교수신문 집중진단 ‘학부제 어디로 가고 있나’를 보고
  • 교수신문
  • 승인 2001.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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矯角殺牛의 정책 염려…대학, 지적 탐구의 순수성 보장할 수 있어야
유평근
서울대·불어불문학과

교육부 장관 재임시 학부제를 입법화한 이명현 교수 자신이 ‘지금의 학부제는 사기다’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가면서 현재 교육부의 주도하에 시행되고 있는 교육 정책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비판하고 있는데도 어찌된 셈인지 교육부 당국자는 학부제는 우리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만능 열쇠이고, 그 부작용은 오로지 대학 당국과 교수들의 편견·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교육부가 주장하고 권장하는 교육정책의 내용의 핵심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학부제’와 ‘모집단위 광역화’로 압축된다. 교육부의 주장에 의하면 두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분열된 유사학과를 통폐합하고 학과 간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택하게 된 학과의 전공을 4년 동안 억지로 이수해야 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기회를 폭 넓게 제공하고 학생의 수요에 맞게 새로운 교육 과정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개혁의 내용은 학문간의 상호 연계와 소통(interdisciplinarity)을 강조하는 현대의 추세에도 부합된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제도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예컨대 학생들이 일정한 인기 학과에 쏠리게 된다는 우려 등은 그야말로 기우인 것이 학부제 하에서는 학과는 교수 조직이 되고 모집 단위는 학생 조직이 돼 전공이 없어도 학과에서 제공하는 강좌에 수강하는 학생이 많으면 그 과는 당연히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디시프리너리티’의 함의

지면만 허락한다면 이 주장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고 대안을 제기하고 싶지만 이전에 다른 기회에 신물이 나도록 우리의 견해를 자세히 밝힌 바가 있기에 여기서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점들만 몇 가지 지적하기로 한다.

우선 교육부 당국이 현대의 세계적 학문 추세라고 내세우고 있는 인터디시프리너리티라는 용어의 함의가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에 놀란다. 이 용어는 당국자가 이해하듯이 고작 ‘연계 전공(cross-departmental program)’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전통적 학문이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만을 중시해온 결과 도막난 지식의 심화는 가져왔지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 안목이 결여된 현상을 놓고, 그에 대한 반성에서 자연 발생한 개념이 소위 인터디시프리너리티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전공 심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렇게 심화된 학문간의 상호 교류를 염두에 둔 것이지 결코 분과 전공의 도태나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본래가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화합에 토대를 둔 개념이기에 객관의 극단인 정밀 수학으로부터 주관의 정점인 예술 과목에 이르는 폭넓은 교양 교육의 ‘균등한 배분’ 정신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좀더 확대 해석하자면 학부의 교과과정이 교양교육, 전공교육, 자유선택과목을 유기적으로 체계화해야 하는 당위성 또한 그 개념의 정신에 부응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인터디시프리너리티란 대학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대학 사회에 경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대학의 학문 수준과 외국의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인데 기초 학문, 응용학문, 전문학문을 병치시켜 그것들 사이에 경쟁을 시키는 것은 참으로 당치 않은 일이다.

다음으로 대학 내의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살펴보자. 학생은 일반 소비자와는 다르다. 대학에서 학생에게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나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일방적 수요와 수용에 대비해서 마련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는 실천적인 능력을 키움과 동시에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비판적 능력을 갖춘 균형 잡힌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서 능동적으로 기획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중심 교육이라는 것은 모든 선택권을 학생에게 방임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의 상태에 있는 학생이 성숙 단계로 올바르게 진입할 수 있도록 대학이 섬세하게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학 자체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대학이 대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기능이 대학 교육과 취업 시장을 직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급변하는 시장의 속성과 가속적으로 단축되는 전문 지식의 수명 때문에 대학이 시장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부응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요즈음의 일반적 견해인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기능은 직접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 지식의 교육보다는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해야 한다.

개념왜곡과 준비미비로 矯角殺牛

다음으로 대학은 지식 탐구의 순수성을 보장해야 한다. 대학에서 지적 탐구의 순수성이 상실된다는 우려가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경시되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너무 단기적인 실용성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수성의 상실이 치명적 손실인 까닭은 그것이 기초학문 탐구의 본래적 속성이며 자유로운 창의성의 원동력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의 순수성과 실용성도 相生관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예는 생략하겠지만 요즘의 많은 첨단의 실용적 도구들이 순수한 지적 탐구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산출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끝으로 지식의 윤리적 사명을 우리는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잠재력이 막강하면 할수록 이를 비인간적이거나 반인류적 도구로 악용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할 책임이 대학에는 있으며 그러한 기능은 지식의 단기적 실용성만 강조하는 국가정책이나 대학 제도하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기계론적 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근대식 대학에서는 학문들과의 관계가 차단된 채 저마다 各生을 도모하였다면 오늘날 현대의 대학은 이질적인 학문간의 유기적 공조체제를 마련하여 相生관계를 맺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학부제’와 ‘모집단위광역화’는 전자는 우리가 지적했듯이 개념의 왜곡으로 인하여, 후자는 전임 장관 자신이 고백했듯이 사전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행해져서 矯角殺牛의 우만 범하고 있다. 행여 대학이 교육부의 난도질에 토막살해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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