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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또는 山川의 미학
능소화, 또는 山川의 미학
  • 김윤식 / 서울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08.05.1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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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박경리의 문학이 놓인 곳

『토지』(솔출판사-전16권, 나남출판사-전21권)는 대하소설로 규정되어 있소. 첫 장을 열면
맨 먼저 1897년이라는 숫자가 앞을 가로 막소. 『토지』라는 이 장대한 바둑판의 첫 돌인
이 아라비아 숫자란 대체 무엇이며 이로써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제5부 마지막의 끝내기 바둑돌에로 관심이 갈 만하오.
그것은 8·15라는 또 다른 아라비아 숫자이오. 대대로 服屬 신세였던 조선조가
대한제국으로 비상하려다 일제에 강점당한 기간이 거기 시퍼렇게 살아 대하소설이 감당해야 될
시대적 총체성으로 거기 있소. 공간적 총체성은 섬진강을 사이에 둔 하동땅 평사리 최참판 댁.
경상도와 전라도를 어우르는 지리산이 바로 그것.

인물의 총체성은 세 개의 큰 동심원으로 되어 있소. 하동 악양 들판의 만석군 최참판댁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그 하나. 최참판댁의 실권자 윤씨 부인을 비롯 당주 최치수, 별당 아씨,
딸 서희 등이 중심원을 이루었다면 무당 월선네, 봉순, 김길상 등 몸종들이 그 다음 동심원을
이루었고, 그를 둘러싼 또 다른 동심원에는 매력으로 가득한 사내 이용, 생명력 넘치는 임이네,
악녀 귀녀, 그리고 애처로운 기녀 월선, 한을 안은 구천 등이 있소. 그 가장 외곽의 동심원이 중
우관, 혜관, 소지감 등이오. 두 번째는 하동 땅 양반 이부사댁 이동진과 그 아들을 둘러싼 동심원. 세 번째 동심원은 역관 출신의 교육자 임명빈과 그 누이.

놀라운 것은 수백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이 각각 생동하고 있음이오. 작가의 자질이랄까
역량으로 치부하기엔 크게 모자라는 것. 바로 여기에 총체성의 그다움이 있소.
그것은 작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무게가 따로 있었기 때문.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위의 세 개의 동심원 중 두 개가 부딪치는 장면에서 선연하게 드러나오.
최치수와 동문수학한 읍내 청백리 이부사댁 당주 이동진이 독립운동 하러 연해주로 떠나면서
작별 차 최치수를 방문했을 때 분명 이렇게 말했소. “석운(昔雲), 자네가 양반임을 의심할 수 없지. 허나 선비는 아닐세”라고. 재물을 모은 최참판댁이란 경멸의 대상이기에.
이에 발끈한 최치수의 반론은 어떠했던가.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라고. 이에 대한 이동진의 답변이야말로 『토지』의 참주제가
깃든 곳.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네. 굳이 말하라 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솔출판사판, 제1부 2권, 153면, 이하 같음)”
작가는 이 대목을 그대로 제5부 1권(296면)에도 제5부 4권(81~82면)에서도 커다란 울림으로
복창해 놓고 있소. 『토지』의 참주제는 최치수의 오기도, 최서희의 뱀처럼 영리한 처세술도,
복수담도 아니며, 하물며 탱화나 그리는 무능한 김길상일까보냐. 이 ‘산천’에 비하면 민족주의·사회주의나, 친일파·독립운동 또는 무슨 평화주의 따위란 얼마나 초라한가.
그렇다면 그 ‘산천’이란 또 무엇인가. 삶의 영원한 터전, 신식 용어로 하면 ‘자연’이 아니겠는가. 생명사상 그것 말이외다.
이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 작가의 솜씨는 민첩하오. 뻐꾸기 울음소리와 능소화의
도입이 그것. 그것도 각기 대여섯 번씩이나 반복하기.
“(A) 용이는 광포하게 날뛰었다. 여자를 사랑하는 짓이 아니었다. 여자를 짓밟고
자기자신도 짓밟고 그 폭력에 놀란 월선이는 …  희열과 고통스러움, 절정이 지나고 어둠과
정적이 에워싼다. 용이는 여자 가슴 위에 머리를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는 신위도
제물도 없고 월선네의 힘찬 巫歌도 없고, 용기 모친과 강청댁의 얼굴도 없었다.
마을도 없고 삼거리의 주막도 없었다. 논가에서 울어쌌는 개구리 소리, 숲에서의 뻐꾸기
소리뿐이었다.(제1부 1권, 175면)”

“(B) 모기가 앵!하고 지나갔다. 아까 별당에서의 그 무시무시한 긴장이 되살아났다.
어느듯 글 읽는 소리는 멎었고, 그러나 멀리서 뻐꾸기 울음이 들려왔다.(제1부 1권, p.278)”
(A)는 용이와 월선의 정사장면, (B)는 윤씨 부인의 태기를 진찰한 문의원의 난감한 장면.
뻐꾸기 소리는 구천이 별당 아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탄신하는 대목(제2부 2권, 196면),
또 동학 잔당 강쇠와 구천이 함께 듣는 지리산 속의 장면(제2부 2권, 202면)에서도 울리고 있소.
어느 것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보시라. 어느 장면이든 밤중이
아니겠는가. 어째서 뻐꾸기는 밤에만 우는가. 이 의문을 물리치기 어렵소. 작가는 일찍이
이 울림을 시로 읊어마지 않았소.

저승에서 우는가 이승에서 우는가/알 수 없었다/분명/산 속에 있긴 있을 터인데/
나는 아직 그 새를 본 적이 없다/내 인생에서도 보이지 않았던/그 많은 것들과 같이/
뻐꾸기를 본 적이 없다
(「뻐꾸기」 부분, 박경리 시집 『자유』, 솔출판사, 1994)

이와 나란히 능소화가 또 대여섯 번 화려하게 피어 어두운 ‘토지’를 환하게 밝히고 있소.
“등잔불을 바라보는 환(구천)이 귓가에 부친(김개주)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듯하다.
「네 아버님. 소자는 … 그렇지만 아버님 불쌍한 서희에게… 」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참판댁 담장이 떠오른다. 비가 걷힌 뒤의 돌담장에는 이끼가
파랗게 살아나 있다.(제1부 3권, 333면)”

凌宵花, 이는 글자 그대로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 아니겠소. 6월에서 8월까지 붉게 무수히 피는,
도도하고도 화려하고 또 천박해 보이는 능소화란 최참판댁을 상징하는 것. 재물과 권위와
천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러기에 대하소설 『토지』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었을 터.
한에 맺힌 뭇사람도,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민초들도 산천 속에 놓고 볼 때 그 문학적 형상화의
최대로 하면 뻐꾸기 소리일 수밖에. 최참판댁으로 상징되는 도도함과 천박함의 형상화 방식의
최대치가 능소화일 수밖에. 여기까지가 『토지』의 작품론이오. 요컨대 총체성을 겨냥한 『토지』의 최종심급이 산천(자연)이라는 것.

그러나 이 총체성은 잘 음미해 보면 구체성을 동시에 갖추었음이 판명되오. 『토지』 제5부에
그 해답이 감추어져 있소. 8·15를 눈앞에 둔 제5부는 모든 인물이 지리산을 향하고 있소.
이 지리산은 김길상을 불러들여 탱화 관음상을 그리게 했고, 그 장남 최윤국도,
김길상을 최길상으로 민적까지 둔갑시킨 교활한 최서희도 그 탱화를 모신 절로 불러들이지
않았겠는가. 지리산은 동학잔당, 징용·징병 기피자들, 사상객도 넉넉히 품어 주었소. 역관출신
임명빈과 친일 귀족에게 시집간 그의 누이 명희, 그리고 최서희도 불어난 지리산 식솔을 위해
돈과 곡식을 올려 보냈것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서희의 차남 최윤국이 학병으로 끌려갔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토지』는 끝났지요. 해방이 왔으니까. 이 『토지』가 끝난 자리에서 학병출신 이병주의,
“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라는 실록 대하소설
『지리산』(1978)이 시작되오.
보시라. 『토지』는 외롭지 않았소. 그 옆에 『지리산』이
있으니까. 진주여고생이 쓴 『토지』를, 와세다 대학 2년
중퇴생이 쓴 『지리산』이 버텨주고 있으니까. 좀 더
우리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토지』의 앞 단계도 눈여겨 볼 수 있을 터. 지리산을 멀리 바라보는 남원땅 매안 마을의 청암부인과 이씨 가문 종손 강모의 운명을 다룬 미취학생 최명희의 『혼불』(1983)이 그것.
결론을 맺고 싶소. 『토지』 앞에 『혼불』이 있고 『토지』 뒤에 『지리산』이 있다, 라고.

김윤식 / 서울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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