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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 문화권력 논의의 맥락
[흐름] : 문화권력 논의의 맥락
  • 교수신문
  • 승인 2001.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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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4 18:40:34
김진석 / 인하대·철학

‘문화권력’. 벌써 몇 년 전부터 말이 많은 ‘인문학의 위기’도 그와 연결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확대되는 문화 영역에도 불구하고 드세지는 ‘문화 충돌’의 이유도 그 연관 속에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TV 강연을 하던 김용옥에게도 ‘문화권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9단’을 정치적으로 핑계삼아 그는 지적 논의를 비켜갔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기득권을 비판한다면서 결국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문화권력을 과시적으로 구축하고 재생산하는 데 집착한다고 여겨진다. 기득권 문화를 비판하면서 인문학을 대중화하는 성과가 그에게 없지는 않겠지만, 동양 고대고전을 비시대적으로 과잉해석하려는 지적 욕망이 대중 및 매체의 지배욕망과 결합하면서 문화권력을 생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고전 해석에 대한 비판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학자들은 과거에 대한 연구와 현재에 대한 개입 사이에서 형편없이 찢겨진 인문학의 몸을 성찰할 기회였고, 또 대중들은 폐쇄적 현학주의를 조롱한다는 사실을 지적 기득권자로서 자각해야 할 기회였다.

섣부른 이념적 재단 경계
인문학 위기에 대한 적지 않은 논의도 대부분 ‘지원’ 문제로 흐른 것은 유감이다. 한편으론 실용학문의 시장논리를 소리 높여 비판하면서도 기껏 돈에 집착하는 일은 자가당착일 뿐 아니라 위기의 성격을 은폐하는 일이다.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강력한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인문학의 매트릭스가 사회인 한, 교육 및 대학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무능하고도 권위적인 문화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자칭 보수 신문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대형작가가 된 이문열이 극우적 경향을 보이는 행태에 대해 비판이 있었고, 더 나아가 유력 문학계간지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정말 명성과 힘에 걸맞은 실천적 활동을 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을 제기한 쪽은 비판의 대상을 그저 부정하거나 거부하려 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들이 이제까지 누렸거나 현재 누리는 상징적 문화권력이 오늘날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합당하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하였다.
문화권력의 논점은 그저 권력을 부정하거나 배제해야 한다는 순전한 안티 파시즘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상징적 권위에 상응하는 실천적 효과와 역할이 이루어지고 있느냐가 쟁점인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 지식인들이 근대화 이후 일반적으로 극우와 우파를 구분하지 못하는 잘못을 왕왕 저질렀다면, 작가와 비평가들도 문화권력에 대한 정당한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 점에서 강준만의 문학사회학도, 기존 문학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나름대로 충분한 몫을 가진다).
물론 그런 작업과 동시에,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가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학 텍스트’의 성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가 아니라 문화와 권력이 맺는 관계일 터이니. 한 예. 미당의 경우, 그가 다만 적극적 친일을 하거나 5공 시절 저열한 아부를 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그런 정치적 실수의 ‘반복’이 그저 문학 외적인 실수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초월성을 서정적으로 미화하는 문학 텍스트에 의해 끝없이 유인되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문화권력에 대한 비판을 다만 이념적으로 재단하는 방식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윤지관 같은 강단좌파는 문학권력논의가 계급성이 없기에 애초에 잘못되었다고 하고, 정과리는 거꾸로 그것이 기껏해야 구 좌파의 대리행동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이 둘 모두 빗나간 지적이다. 물론 ‘문화권력’ 혐의를 제기하는 사람의 담론이라고 저절로 깨끗한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러니 이 논쟁을 지식인답게 이어갈 일이다.
왜 이렇게 문화권력이 문제가 되었을까? 문화가 엘리트주의적이고 의례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었고, 그때 문화는 더러운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성격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확장 속에서 그런 미학적 전제는 거의 무너졌다. 문화 작품이 그저 상품으로 환원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과 권력의 자장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을 것은 자명하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 문화는 어떤 영역보다 더 사회적 차별과 차이를 재생산하고, 심지어 정치적·경제적 차별을 미학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한다.

자본과 권력 사이, 지식인의 설 자리
이 점에서, 문화(문학)권력 논의는 현대 문화 속에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문화를 적으로 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적 비아냥은 한참 잘못된 진단이다. 오히려 교육과 지식의 권력화와 맞물리면서, 문화영역의 확장이 사회적 차별과 위계질서를 문화적으로 승인하고 정당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 보자, ‘문화의 시대’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문화자본은 무한하게 팽창하는데, 문화활동들은 승화에 기여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차별을 구성하고 더 나아가 세분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얄궂게도 원인은 그저 ‘나쁜 시장’ 이 아니라 상징 권력을 정당화하는 문화 자체의 얄미운 특성이라니. 다르게 말하면 바로 문화의 ‘발전’ 때문에, 비판의 영역이 문화적으로 확장되고 비판의 방식도 문화적으로 예민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와중에서 문화자본과 문화권력의 한 중추세력인 지식인의 역할은 분열적이다. 문화권력의 강화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민주적으로 저항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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