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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 교수신문
  • 승인 2008.04.0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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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비사]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②

영남대는 1988年 당시 文公委員會의 국정감사후 박근혜씨는 이사직에서 물러가고, 교육부에서 임시이사會의 派遣을 받게 됐으나, 定款에 ‘校主 朴正熙’는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창학정신’을 운운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런 연결이 가능한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용맹한 사나이“ 라면 몰라도 어디서 느닷없이 ‘창학정신’이냐 말이다. 이것도 사회의 어느 ‘엘리트’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느냐 싶으니, 더욱 한심하다. 이 나라에서 국정감사의 결론은 도대체 어떤 효력을 지니는지, 안 지니는지? 이 감사에서 그 학교의 성립과정의 비리가 여지없이 폭로되고, 換骨奪胎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校主 朴正熙’는 2005년 다시 국회에서 白元宇 의원이 문제제기를 했으나  일과성으로 지나간 모양이다. 그러나 영남대에 몸담은 소위 ‘지성인’이 이것을 개의치 않는다면, 국회의원들의 鈍感을 탓해서 무엇하랴.
그 동안 영남대를 구성하는 집단은 하나의 폐쇄된 작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 학교의 현역들이나 동창회에서는 그 전신인 靑丘, 大邱(舊)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新設한 학교임을 믿고 싶은 나머지, 국정감사에서 호되게 그 정체성이 叱咤당한 것 쯤 馬耳東風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명색이 대학이라고 차려놓고 있으니, 역사란 것도 좀 자랑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세월의 깊이를 말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역사자료’를 수집한다고 옛날을 기념할 수 있는 사진, 물품, 증서 등이 있으면 가지고 와 달라고 신문에 기사로 내기도 했다. 좀 인색하나마 여기서는 “옛 대구, 청구 자료도 환영” 한다고 한다(조선일보 2001.11.21). 역사적 자료를 말한다면 설립자 집안을 외면하고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緣木求魚를 하고 있다. 이것도  그 학교의 모순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2006년 4월 교육부 사립대학지원과는 영남대를 (무슨 理由인지) “임시이사 선임사유가 解消” 된 학교로 선포하고, ‘학원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제출할 것을 임시이사회에 시달했다. “학내 구성원, 상당한 재산 出捐者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 者등, 이해관계인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收斂(수렴)한, 현실성 있는 합의안을 마련하여 추진하시되, 이로 인하여 학내문제가 다시 야기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 “상당한 재산 출연자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 자”를 말하면서 학교의 始原인 ‘설립자’에는 언급이 없으니 공문 작성상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느냐 싶다. 학교란 재력으로만 성립될 수 있는 물건인가? 쏟아 부은 정신과 노력은 교육의 안중에는 없는 것인지? 굳이 재산을 말한다면, 설립자는 赤手空拳으로 시작했으나 18年 육성 끝에 靑丘大學의 자산을 당시 20억은 축적했노라고 자부했다. 여하튼 선의로 해석한다면, ‘학교발전에 기여한 자’와 ‘이해관계인’을 말할 때는 ‘학교를 창설한 자’로서의 ‘이해관계인’은 말 할 여지도 없이 포함된다고 看做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영남대는 이 示達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설립자측은 깡그리 무시하고 드니, 그 상식의 정도를 의심한다.  설령 무시하고 싶었더라도 이래서야 ‘현실성 있는’, ‘이로 인하여 학내문제가 다시 惹起되는 일이’ 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설립자에게는 傍若無人으로, 장차 학교를 어떤 식으로 요리하느냐를 검토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신문에 떠들고 있으니, 감히 말하건대, 이것이 大盜의 심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설립자측으로 봐서는 대통령에게 빼앗겼거나, 임시이사회에 빼앗기거나 아무런 다름이 없다.  이걸 ‘社會還元’이라 한다면, 학교 자체가 원래 사회사업이지 무엇이었던가? 한심하고 가소로운 것은  학교가 처음 발족할 때는 태어나지도 아니했던, 나이 어려 東西 분간을 못했던 사람들이 까마득한 선배 어른들이 心血을 쏟아부은 업적을 맘대로 요리하고자하는 이 현상이다.  

2002년에 박씨 遺族이 거금을 들고 와서 다시 대학을 점령할 욕심을 보였을 때, 당시 임시이사회는 이를 거절했다한다. 그러나 2005년에 영남대는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함으로써 “한 시대와 과거의 어두운 유산을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고 喧傳했다(每日新聞 2005.9.27.) ‘박정희 校主’를 確信하는 자세다. 그리고 한 시대와 과거의 어두운 유산은 박씨와 김씨 사이의 개인적 화해로 끝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영남대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정치성을 띄어도 되는 것일까? 그 정치성의 내용의 蒙昧함은 또 다른 얘기다. 누가 옳고 그른 시비는 고사하고, 그 동안 암담했던 사회적 갈등과 피로 얼룩진 투쟁의 역사가 어디 어느 두 개인의 반목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였더냐 말이다. 이런 무지와 愚昧가 지성의 전당을 지배하는 정신이니, 이것은 些少한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오래 오래 기다렸던 단 비의 첫방울을 맞는 기쁨을 말했다. 50년 전 6.25 때 희생된 骸骨을 이제야 파헤치고 鎭魂祭祀라도 치러 줄 수 있게 됐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그 동안 기나 긴 겨울 공화국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혹자는 그런 얼어붙은  세월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필요악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경제학을 믿지 않는다 - 경제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여하튼 여기까지라도 싸워 나온 우리 정신의 승리를 치하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잔치를 벌릴만 한 快勝은 아니니, 일전에 본 신문에서 어떤 이는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를 말하고 있었다. “민족반역자든 反民主의 범죄자든 스스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거꾸로 용서와 화해, 相生을 먼저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잘못된 역학관계라는 것이다. 억지 春香을 기대하고, 업드려 절 받기를 바라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우스운 꼴이다.  하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택함으로써” 용서를 구하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운 逆說의 땅이 되고 말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홍세화, ‘윤한봉 형, 그는 갔다’, 한겨레, 2007.7.11).

지난 해 박근혜 씨는 故 張俊河 선생 유족을 찾아가 謝罪를 했다. 과연 발은 옳은 방향으로 돌렸다 하겠다. 遺子는 이걸 받아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未亡人 金 여사는  이것이 “정치적 목적에 따른 거짓 謝過가 아니라, 진정한 애국애족의 苦悶에서 나온”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하겠다는 말로 맞이했다니, 말은 바로 했다(한겨레, 2007.7.12). 진정 박씨도 여기에 한 마음이라면, 앞으로 巡訪하여 사죄를 할 데는 줄을 이어 서있다. 만약 이것을 실천한다면, 비로소 ‘逆說의 땅’을 ‘順說’의 땅으로 바꾸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亡父에 대한 진정한 孝道라 할 것이다.

어찌하여 靑丘大學은 靑瓦臺로 갔나?
1967년 6월 15일까지 靑丘大學 存續 여부의 문제는 있지도 안 했다. 1966년 12월 30일 교내의 말하자면 ‘茶잔 속 폭풍’과도 같은 突發 사건으로 1967년 들어 설립자는 蟄居하고 있었으나, 新運營陣은 ‘名譽學長’으로 모시는 자세로, 諮問에 응해 줄 것만 懇請하는 반면, 설립자는 화를 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上記한 날 正午 新築中인 校舍가 붕괴하여 사상자가 나고 신문, 방송으로 널리 보도되고부터 판국이 달라졌다. 去年末 설립자 也靑先生의 주도하에 3층 설계로 착공하다가 중단된 것을 新陣營은 경제 이유로 6층으로 올리려 한 것이다. 也靑은 황급히 병원을 찾아 피해자를 위문하고 학교에 달려가 新陣營과 선후책을 논의할 요량이었는데 그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지금 건축물 설계문제로 司法 조사를 받게 돼 있는데, 원래설계가 6층이라고 우겨야 할 마당에 설립자의 출현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옹졸함도 可歎이거니와, 설립자의 憤痛이 어떠했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많은 사상자에 대한 보상, 끔찍한 사법문제와 사회에 대한 책임,  숙제로 남은 재정문제, 거기다 아마 설립자에 대한 미해결의 인간적, 도의적 문제를 싸잡아 뜨거운 감자를 靑瓦臺로 넘김으로써 해결책으로 여긴 모양이다. 여기서 청구대학 문제는 대통령 박씨    이전에 이 나라 소위 지식人들의 道義問題에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까지 설립자의 곁에서 일 있을 때마다 우정어린 輔弼을 해 오던 鷺山 李殷相씨가 오늘은 청와대에 들어가 “‘大統領을 百年 할 수 없는데, 그만 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 설 생각은 해 보았는가? 會社社長이 될 수 없고, 외국에서는 대학총장을 하는 일을 많이 보는데,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로 시작하여 그 능란한 말솜씨로” 進上을 裝飾한 것이다(嶺南大學校五十年史, 嶺大出版部, 1966, p 195).
1967년 6월 29일자로 된 理事들의 進上 覺書에는 기이하게도 이사장 자리는 비어있다(前揭 嶺南大學校五十年史 p.72 참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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