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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우리의 삶을, 살아서 증명하자’ 어느 시간강사의 고민과 삶
[논픽션]‘우리의 삶을, 살아서 증명하자’ 어느 시간강사의 고민과 삶
  • 교수신문
  • 승인 2008.03.1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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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시간강사 오리엔테이션과 워크숍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이 교양영어인 까닭에 개학할 때마다, 비록 형식적이지만 늘 이런 행사를 한다. 원어민과 한국인 강사가 50명을 훌쩍 넘기 때문에, ‘효율적 관리’를 위해서도 행사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강좌를 경험한 적도 없는 전임 교수가 책임을 맡고 있다. 강좌 체계가 좀 복잡한 까닭에, 직접 가르치지 않으면 언급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책임 교수는 강의도 하지 않으면서 1년 혹은 2년마다 바뀐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사들의 의견을 결코 청취하지 않는다. 강사들이 강의실 현실을 이야기하고 자기가 그것을 진지하게 들으면, 마치 교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책임 교수들은 아예 행사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석하는 경우 언제나 강의실 실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뜬구름 잡는’ 강의 지침을 전달한다.

몇몇 강사들의 이어지는 발표가 끝나면, 우리가 제일 기다리는 식사시간이다. 전달된 강의 지침이 강의실 실정에 맞게 ‘폐기’되거나 ‘교정’되는 시간이다. 강의 계획에 대한 의견 교환, 방학을 보내고 사라진 몇몇 얼굴들의 임용에 대한 이야기, 새로 등장한 얼굴들의 인사 등이 이뤄진다. 한참의 대화가 오가던 중, 어느 여자 강사가 “또 한 명 자살했다던데, 텍사스 주립대 박사래요” 하고 소식을 전했다. 순간 그 원탁에 앉았던 모든 강사들이 눈을 동그라니 하고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속삭인다. “서울교대에다 미국 박사가 왜 자살을 하지?” “정부 바뀌고 테솔, 테솔 하던데, 테솔 박사면 앞으로 탄탄대로 아닌가?” 30, 40대 지방대 출신 박사들은 우선 그 화려한 학력에 감탄하고, 자살을 선택한 이유에 의문을 가지며, 40대 중반 그 생활의 무게에 짓눌렸을 심정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했다. 또 한숨. 누군가 지방대 출신은 자살하더라도 기사 한 줄 안 난다면서, “그래도 미국 박사니까, 이번엔 언론들이 기사 한 줄 정도는 받아주겠지” 하고 자조한다.

내 나이 40대 중반이지만, 직장을 다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까닭에, 강의 경력은 11년차에 불과하다. 그리고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지원해본 경험도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그 ‘생존경쟁’의 현장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체제에 어울리지 않는 나는 나약한 존재다. 인간의 행복에 기여할, 존재에 대한 고민과 인식과 세상살이의 실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인문학을 하는 나를 그 속에 집어넣는 것은 어찌 좀 ‘잔인한 행동’ 같았다. 그로부터 타인과 관계를 통해 뭔가를 실현시켜보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토록 내 세계관이 바뀐 이유는 바로 나의 10년 강사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과정을 마치고 처음 강사를 할 때는 사실 꿈이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학생들과 함께하는 강의와 나름의 연구 활동의 안정적인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기대했었다.

강의 기회가 주어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강의하면, 언젠가 때가 오겠지. 정말 열심히 강의했다. 주 30시간. 시간당 1만2천원하는 전문대에서부터 1만8천원하는 4년제까지 내 자동차 바퀴에 불이 나도록 달렸다. 어떨 때는 야간 강의까지 포함해서 주 40시간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매주 2박3일 시외 여행을 다녔다. 점심과 저녁은 도시락을 사서 차 안에서 옮겨 다니며 해결해야 했다. 알다시피 ‘음주 운전’과 달리 ‘식사 운전’은 단속 대상이 아니다. 교차로에 서면 밥을 먹고 씹으며 운전했다. 찜질방과 친구 외국인 강사의 집 등을 전전하며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말을 내 몸으로 직접 확인했다. 연봉 2천을 넘어보는 것이 꿈이 되었다. 그러나 장애 요소가 생기기도 했다. 가끔씩 강의를 주는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잘리기도 했다. 그러나 더 큰 장애 요소는 몸이었다. 내 몸은 그 꿈을 실현시킬 만큼 강건하지 않았다.

좀 굶더라도 논문을 먼저 쓰자, 마음을 바꿔 먹었다. 모교로 돌아가 약간의 강의를 하며, 책을 읽고 사색의 시간도 좀 갖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임용과 관련한 구체적 경험과 전언들은 내가 왜 논문을 쓰는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학과 내 파벌 싸움과 별도로 나의 지도교수는 국내 박사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학문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도하고 학위를 주는 노학자의 입에서 그런 공공연한 ‘자학적인 동시에 가학적인 발언’을 들을 때마다, 내가 정말 거대한 코미디의 무대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곤 했다. 학부에서부터 서울(대) 박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외국(미국) 박사가 아닌, 나는 이미 피규정돼 있는 ‘학벌 족쇄’ 때문에 ‘주변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우스운 일은 지방 대학에서 미국 박사를 뽑아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수는 서울로 줄행랑친다는 사실이다. 이미 관행화된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지방대 교수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학위를 따야만 했다. 학위가 있어야 학술진흥재단(학진) 프로그램에 명함이라도 좀 내볼 수 있는 까닭이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학위논문 예비 발표도 했다. 그런데 지도교수의 ‘심사 관례’에 대한 특별 지도를 받으면서, 나는 논문을 위해 줄였던 수업 시수를 후회하게 됐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박사가 되기 위해서 코스웍과 논문 쓰기, 그리고 논문 심사만큼이나 정성을 들여야 하는 과정이 또 있다. 바로 ‘밥사,’ ‘술사’와 같은 과정이다. ‘그 친구 인간이 됐어’ 혹은 ‘그 친구 예의가 없어’ 라는 양 갈래는 그 과정을 어떻게 거치느냐에 달려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심사료 외에 별도로 심사 때마다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봉투를 준비해야 했다. 그 양날의 칼 앞에서 논문을 들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나는 공손히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강의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공부를 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진이 그 유일한 통로였다. 지원 자격의 논문 편수를 채우고 곧장 지원했다. 걸렸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학진形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 학진 지원서 형식에 어울리는 문서작성 능력이 요구되는 글쓰기다. 자기 세부전공을 불문하고 주제도 학진의 전반적인 경향에 맞춰서 잡아야 한다. 강사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학진 형 인간’이라고 한다. 주변의 ‘학진형 인간’들은 ‘강사 재벌’(사실 도토리 키 재기이지만)이라는 우스개 명칭으로 불리며 동료 강사들 모임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논문 때문에”하면서 꼬리를 뺀다. 나도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다. 옆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초라한 우리끼리 만나서 세상을, 학교를, 교수들을 탓하며 내 스스로를 학대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교수들 눈치 안 보고 내 공부 마음 놓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는 강사들에게 긴요한 숨통이 되는 현실이다.

많은 박사들이 이런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그들은 자기 전공과 별도로 그 사업에 기여하는 글쓰기로 성과를 내야 한다. 실제로 그 탓에 신선한 논문들이 많이 생산되기도 한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학자들이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프로젝트에 맞게 끼워 넣어지는 추상화된 객체로 전락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학자 고유의 인간적 향기와 학문적 취미가 살아 숨쉬는 글쓰기 작업이 사라지고 있다. 2003년 서울대 백준희 박사는 프로젝트의 노예가 되는 자기를 비관하며, 이 땅에서 시간 강사도 교수도 아닌 ‘아무도 아닌 자’가 되고 싶다고 적고는 학교 뒷산에서 목매 자살했다. 자기 혼을 팔고 고갈시키는 연구와 글쓰기는,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 강사로서의 자기 모멸감은, 대한민국의 시간 강사라면 누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정말 가슴 아프다.

아무튼 프로젝트는 많은 강의로 인한 소모와 만성적 빈곤 상태의 최저선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는 길임에 틀림없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내가 속한 인문학 분야에도 사업 형태든 학교 자체의 제도로든, ‘박사 후 연수과정’을 많이 시행하고 있다. ‘학문후속세대 양성.’ 얼마나 마음에 드는 구호인가. 나도 한번 양성되어보고 싶었다. 운 좋게도 사전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 들어가게 됐다. 연봉 2천 전후를 받는 나를 포함한 그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논문 한 편 이상을 써내야 한다. 조건이 있다. 공동 저자로 전임 교수의 이름을 하나 올려 발표하는 것이다. 시간을 쪼개가며 책 읽고 쓴 논문에, 그 연구를 위해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얹어야 하는 우리의 심정은 참담하다. 돈을 미끼로 한 ‘학문후속세대 양성’ 제도는 ‘연구물 착취구조’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표절이자 강탈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국사회의 법과 관행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내 연구와 나의 빈곤 탈출을 위해 내가 들어갈 여지가 있는 법과 제도 속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던 중 내가 속한 교양강좌의 강사들에게 새로운 제도적 변화의 물결이 강타했다. 그것도 학칙이나 문서화된 내규의 변화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책임 교수의 입에서 나온 ‘강사 자격 연한 4년과 토익 성적 제출자에게 2년 연장 허용’이라는 발언이 곧 법이 됐다. 우리는 비상 총회를 열고 공동 대처하기로 결의했다. 나는 이보다 더한 코미디가 없다고 생각하고 ‘강사협의회’를 결성했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상황의 강제에 의해 앞으로 나서게 됐다. 교수가 되기를 포기했으니, 눈 밖에 나더라도 상관없었던 까닭이다. 교양 강좌를 총괄하는 철학박사, 그것도 외국박사에 민교협 회원이라고 자랑하기도 하는 그 교수도 일단 정해졌으니 무조건 간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자기 학교가 준 학위를 자기 학교가 믿지 못하고, 외국의 사설 교육기관의 시험으로 “객관적으로 검증하겠다”고 교수들이 나서는 일이었다. 바로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자기 조국 아일랜드의 풍토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비꼬는 비유인 “자기가 낳은 새끼를 잡아먹는 암퇘지”의 그것과 흡사했다. 우리는 여기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들어야 했다. 결국 몇몇은 거부하고 잘렸다. 그리고 몇몇 젊은 여자 강사들은 ‘객관적으로 검증’당했다. 그러나 신규 강사 채용에 실패한 그들은 신학기를 앞두고 자기들이 “당당하게” 보란 듯이 잘라낸 강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원위치 시키는 촌극을 벌였다. 이후로 우리는 책임 교수가 바뀔 때마다, 마치 군대에서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바뀔 때마다 갖게 되는 그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경계한다.

최근 들어 ‘글로벌 스탠더드’를 기치로 대학 세계화에 뛰어드는 학교들이 늘어가는 추세다. 기왕에 대학 스스로가 키워낸 자기들의 ‘국내 박사’를 믿을 수 없다면, 대학원을 폐지하고 인력 양성도 과감하게 ‘경쟁력 있는’ 외국 대학에 외주를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교수되기를 잘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내 생활에 대한 자기 모멸감이 없어졌다. 이런 심리적 변화는 강의실 분위기의 변화를 가져왔고, 내가 하는 강의가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는 학생들과의 관계도 변화시켜 놓았다. 학생들이 강사에게 던지는 눈길(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웃으며 받아넘길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교양 영어를 무표정으로 듣거나 잔다. 그래서 나의 모토는 ‘표정 있는 수업’이 됐다. 언젠가 한 때 관심 가졌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론에 따라 수업을 해 본다. 따분한 영어 수업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영어 수업을 위해 현재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이것도 학진에 연구과제로 응모해야 할까?

또 하나의 생명이 그 명을 다하지 못하고 꺼져갔다. 우리는 모두 이 우주 속에 하나의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 생명을 통해서만이 우주는, 세계는 실재한다. 그 생명이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01년부터 경북대 1명, 서울대 3명, 부산대 1명, 건국대 1명의 박사 인력들이 자살했다. 그리고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 개정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죽어야 관심을 가지게 될까? 대한민국 대학 강의의 절반을 합법적 교원이 아닌 ‘떠돌이들’에게 맡기고 있다는 사실. 합법적 교육기관의 졸업 학점 절반이 ‘일용잡급직들’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 그래도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받는 학생도, 몸집 불리기에만 혈안 된 학교도, 인재 양성을 통한 국가 미래의 청사진을 고민(?)하는 교육당국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도 죽지 말자. 살아남아서 증언하자.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으로 파괴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는가를 살아서 증언하자.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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