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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쏟아져나온 계간지 겨울호들
[리뷰] 쏟아져나온 계간지 겨울호들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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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3 10:32:01
모두들 테러이야기로 2001년의 마지막 계절을 암울하게 닫을 것이라는 짐작은 빗나갔다. 계간지들은 저마다 다양한 관심사를 풀어냈고, 그 편차는 환절기의 일교차만큼 크고 담론의 스펙트럼은 테러에서 서정시까지 넓고 깊다.

테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

‘당대비평’이 ‘2001년 9월 11일 이후의 세계’를 특집으로 내세운 것은 타당해 보인다. 현 시대의 접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본령대로, 테러 이후 테러보다 심각하게 전개되는 세계의 불안을 팔짱 끼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당대비평에서 주목하고 있는 현실은 테러현상, 테러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테러를 둘러싸고 미 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양자를 규정짓는 ‘폭력’과, 테러를 등에 업고 슬그머니, 그러나 공고하게 고양된 민족주의의 위험천만한 부흥에 대한 우려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사학)는 머리말 ‘성조기, 태극기, 또 하나의 깃발’에서 미국 시민들 또한 아프간 민중과 함께 테러의 피해자라고 규정짓는다. “9·11 테러 이후 고양된 미국 민족주의의 능동적 피해자이자 공적 테러의 참여적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9·11 테러의 역사적 의미는 “미국의 공화주의적 민족주의가 주변부의 종속적 민족주의보다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이라는 허구를 벌거벗겼다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에서 가상현실/실재의 개념을 들어 테러를 설명하고 있다. 6천명이라는 큰 사상자를 냈음에도 실제로 사체를 거의 볼 수 없었던 테러 보도가 “제 3세계 재난 보도의 초점이 소말리아의 기아, 강간당한 보스니아 여성들의 모습 같은 섬뜩한 디테일을 보도하는 데 있는 것과 대조적”이라는 지적은 곧 “현실의 공포는 여기가 아니라 그곳에서 발생한”, “공포의 탈현실화”에 다름아니라고 진단한다. 지젝의 판단은 전대미문의 대참사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평온하고 안정돼있는 미국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미국인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1차 걸러지고 미디어로 2차 걸러진 비현실적인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며, 이번 테러는 미국적 실재와 비실재를 확인시키는 계기인 셈이다. “세계무역센터 폭파와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관계는 살인을 實演하는 포르노그라피와 평범한 사도-마조히스트 포르노 영화의 관계와 같지 않은가”라고 묻는 지젝의 물음이 그렇다. 미국식 평화주의와 비현실적인 헐리우드적인 가상현실이 만나 이룬 하나의 작품이라는 진단을 터무니없는 상상력으로만 여길 일은 아닐 듯하다.

‘사회비평’에서는 특별기획으로 테러에 대한 하버마스의 전언을 실었다. 프랑크푸르트도서견본시 평화상 수상 연설인 ‘무언의 틈새’를 통해 하버마스는 “테러에 대한 전쟁은 결코 전쟁이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을 펼쳐보인다. “테러리즘에는 또한 서로 다른 세계들 사이의 치명적인 무언의 충돌이 표현되고 있는 바,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침묵의 폭력과 (미국의) 미사일 말고 그 너머에서 그 세계들을 소통시킬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테러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편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문학동네’의 지면을 빌어 ‘종결의 정치담론과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를 풀어놓았다. 테러의 원인 규명과 대응방식, 그리고 ‘누가 내편인가’ 혹은 ‘너는 누구편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정치적 담론의 몫이되, 테러 이후 남겨진 분노, 슬픔, 연민을 어루만지는 것, 그리고 ‘부시와 오사마 빈 라덴 중 누가 미쳤는가’를 밝히는 것은 문학의 몫이라는 것이 도 교수의 독특한 시각이다. 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발견한 것은 ‘시의 세계’이다. “시인들은 다투어 위로의 시를 소개하고 인터넷에도 시들이 수없이 교환된다. (…) 시에 대한 관심의 이런 증대 현상을 놓고 어떤 신문은 해석한다. 시를 낳게 하는 것은 사랑과 죽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 위로와 이해를 찾아 시에 눈 돌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현상을 찾아낸 것은 최근 공공도서관 부흥과 국민적 책읽기에 천착하고 있는 도 교수의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다.

문학권력 논쟁과 문학의 새로운 지형

테러 충격과 계속되는 문학 안팎의 논쟁에도 문학 계간지들은 비교적 차분하게 갈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문학과사회’는 ‘우리시의 새로운 지형’을 기획으로 삼았다. 온갖 충격적인 문명사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문학의 입장을 철저히 되새겨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서정시의 지평과 새로운 모색’이라는 글을 통해 장석남, 이윤학 등 신서정 시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창작과비평’ 역시 특집으로 ‘한국 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라는 주제로 달라진 21세기 문학의 지형을 새롭게 짜려는 시도를 보인다. 임규찬 성공회대 교수(국문학)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에서 다시 문학비평의 쟁점으로 떠오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임교수가 들여다본 텍스트는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황종연 동국대 교수(국문학)의 평론집.

“기본적으로 대립적이기만 했던 두 개념어가 때로 한 몸체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를 원하는 느낌”을 통해, 우리 문학 혹은 비평이 곤경에 처한 징후를 읽고 있다. 대립의 개념어 역시 문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을 위한 행위임이 분명하고, 불안한 징후 역시 필연적으로 가야하는 길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문학권력 논쟁과 관련해서 드디어 ‘문학동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평소 ‘직설법은 천박하다’는 속내를 적절히 드러내며 담론의 간접화법을 즐겨 써왔던 ‘문학동네’에게 ‘문학과 정치’라는 직설적인 특집 제목은 자못 도발적이기 그지없다. 남진우 문학동네 편집위원은 “혼돈의 시기에 특정 집단의 오류와 악덕을 한 몸에 짊어진 죄인을 적발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말로 문화권력 논쟁이 불완전한 것임을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작금의 문학권력 비판은 부작용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 자체를 비판하는 무의미하고 대책 없는 것이다. “문학이 앓고 있는 병이 아무리 위급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정치판 언저리에서 정육점을 경영하고 있던 사람이 도살장에서 쓰던 크고 둔탁한 칼을 들고 병원 수술실에 쳐들어와 심장수술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인내하고 보아주기 힘든 면이 있다”는 말로, 강준만 교수를 비롯해 문학 밖에 있는 문학권력 논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문학권력은 비판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에겐 명백하게 현존하는 실체이지만 그와 반대되는 입장의 사람에겐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언을 통해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문학권력 논쟁 시작부터 논란이 되어온 ‘문학권력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아직도 합의 불가능한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2001년을 달군 문학권력 논쟁에 더해 해묵은 것으로 여겨졌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대립쌍까지 다시 고개 들면서 문학계는 점점 더 치열한 논란의 장이 되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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