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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海灘 건너뛴 순수의 표정
玄海灘 건너뛴 순수의 표정
  • 김영나 / 서울대· 미술사
  • 승인 2008.02.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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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두 작가의 이색적인 二人展_ 최영림과 무나카타 시코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의 화가 최영림(崔榮林, 1916~1985)과 그의 스승이었던 일본의 판화가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1903~1975)의 이색적인 二人展이 3월30일까지 열린다. 최영림과 무나카타 시코와의 인연은 최영림이 1938년 일본에 가 무나카타에게 판화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평양의 부호였던 최영림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이어가길 바랬고, 그는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무나카타는 이후 195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판화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 일약 세계적인 미술가로 떠올랐으나, 최영림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을 북에 두고 단신 남하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고, 남쪽에서 미술가로서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 무나카타의 근황을 알게 된 최영림은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의 교신은 무나카타가 타계하는 1975년까지 계속됐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일본의 아오모리 현립미술관의 공동주최로 열린 이번 전시는 한국과 일본의 두 미술가의 작품들을 서로 비교·대조하면서 각각의 독자적인 세계들을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다.   

 1938년 일본에서 판화 배우며 인연맺어

평양에 살던 최영림을 무나카타와 연결시켜준 사람은 당시 평양박물관에서 학예원으로 근무하던 오노 타다아키라(小野忠明,1903~1994)였다. 그는 평양박물관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최영림을 비롯한 젊은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영림을 자신이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무나카타에게 보낸 사람도 오노였다. 일본의 작은 마을인 아오모리 시에서 태어난 무나카타는 원래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미술가는 아니었다. 대장장이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 대기실의 급사를 했다. 그러던 중 문예잡지 <시라카바>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감동하면서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 당시 官展이었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길로 들어섰다. 최영림이 그에게 사사하던 30년대 후반에 그는 그렇게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지만 목판화 ‘만타보’(1935), ‘야마토 타케루 왕자의 생애’(1936)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야나기 소에츠(柳宗悅)의 인정을 받게 됐다. 야나기를 통해 그는 민예운동을 하던 도예가 하마다 쇼지, 가와이 간지로, 그리고 후원자 미즈타니 료이치를 알게 됐고, 이들을 통해 불교를 공부하게 된다. 1939년 그가 동경의 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 興國寺의 須菩提像을 본 이후에 제작한 ‘두 보살과 석가 십대제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전시에도 불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그 외에도 일본에 밀교를 들여온 쿠카이(空海) 스님이나 힌두교의 여신, 도교적 주제들에서 온 이미지들이 무나카타 자신의 느낌을 쓴 글과 함께 새겨져 있어, 초등학교만의 학력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지식과 번뜩이는 재능을 보여줘 놀라웠다. 그러나 덕수궁미술관의 전시에는 이러한 작품 내용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어 관람자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렇게 이미지와 텍스트를 같이 결합시키는 무나카타의 작업은 사실 동양의 문인적인 전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인들이 무나카타에 매료되는 이유 중 하나는 목판의 자유분방한 해석에 있다. 나무를 칼로 도려내서 만들어낸 생생하고 즉흥적으로 보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선, 단숨에 특징적인 형태를 잡아내는 재능, 그리고 짧은 글에서 발견되는 해학으로, 일본의 또 한 명의 유명한 판화가 호쿠사이(北齊)와는 또 다른 대가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한편 자화상, 꽃 그림, 그리고 율동적인 선에서는 그가 존경했다고 알려진 반 고흐의 영감도 찾아볼 수 있다. 전시장 입구에서 비디오를 통해 그의 작업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작은 체구에 동그란 안경을 쓴 무나카타가 몸을 책상 위의 놓인 목판에 아주 가까이 구부린 채 빠르게 작업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무나카타가 거의 목판화로 일관했던 것에 비해 최영림은 유화를 더 많이 제작했다. 무나카타보다 약 13세 아래였던 그는 동시대의 현대미술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심은 그의 유화에서 형태의 추상성이나 당시 화단의 관심이었던 앵포르멜 미술에서 강조하던 두터운 화면의 질감 표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50년대에는 아직도 목판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검은 선들이 투박하고 강하게 획을 만들어낸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1960년 이후에는 재현 이미지가 없어진 추상으로 변했다. 갈색 톤을 주조로 하면서도 아주 미묘하게 대비되는 색채의 추상작품들에서 그는 토속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였는지 황토색 흙과 모래를 접착제로 이겨 캔버스 위에 바른 후 다시 그 위에 유화 작업을 했다. 그가 다시 목판을 시작하고 이미지로 돌아간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무나카타와의 재개된 관계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이때부터 그는 민속 전설이나 고전 민중소설, 심청전, 동화 같은 주제, 또는 불교를 주제로 다루게 된다.

최영림과 무나카타가 가장 비교되는 부분은 바로 그들의 여성 이미지다. ‘女와 소’(1969)와 같은 작품에서 최영림의 동그란 얼굴과 터질듯이 불거진 가슴과 육감적인 엉덩이를 가진 여성들은 주체할 수 없는 관능성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원형 표현이지만 체형에서나 둥근 얼굴에서는 무나카타의 여신의 이미지에 바탕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영림의 여성들은 무나카타의 神性보다는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을 가진다. 이들은 낙원에서 꽃과 동물들과 어울려 있다. 소와 여성이라는 동화적인 설정, 민화에서 유래한 언덕의 형태나 새, 호랑이의 모습 등은 상상의 낙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전후의 고단한 일상이나 사회적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최영림에게 이런 그림은 일종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 이후 무나카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주제도 에드가 알렌 포우 소설의 삽화에서부터 뉴욕의 맨하탄, 루브르 박물관의 니케 상으로까지 넓혀 갔고 기법도 복잡하면서도 훨씬 정교하게 변했으나 기본적으로 이미지와 텍스트가 같이 가는 동양 미술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비해 최영림의 세계는 낙원의 이미지, 불심, 동화적 주제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제한된 범위 속에서 그가 얼마나 세련된 색채에 대한 감각과 순수를 추구했던 화가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미술관이 협력하고 일본의 국제교류재단이 후원한 이번 전시는 일본에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신문 지상에 보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아시아의 미술관들이 서로간의 협력체제와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번 전시도 한일근대미술 교류전의 물꼬를 튼 전시라는 점에서 한층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영나 / 서울대· 미술사


필자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미술사와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와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20세기의 한국미술』, 『서양현대미술의 기원』, 『조형과 시대정신: 르네상스미술에서 현대미술까지』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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