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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볕과 그늘에 웃고 울다
‘시장’의 볕과 그늘에 웃고 울다
  • 최성일 / 출판평론가
  • 승인 2008.02.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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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출판소사_ ② 1990년대의 출판사들

1993년 ‘책의 해’를 맞아 출판사들은 이를 기념하여 ’93 책의 해 로고와 앰블럼을 표지에 인쇄한 책을 한 권씩 펴냈다. 한겨레신문사 출판부에선 『책이야기』가 그 주인공이다. 이 책 뒤표지 ’93 책의 해 로고와 앰블럼 바로 밑에는 세로로 짠 이런 글귀가 있다.

“‘목마름의 기억’ 뿐인 70~80년대. 억눌린 이들에겐 힘이 되고, 갈증 난 이들에겐 샘물이, 외로운 이들에겐 위로가 되어준 좋은 책 1백 권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책이야기가 단순히 책 한권, 혹은 한권의 서평책자에 그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책이야기는 암울했던 시절, 우리 세대가 겪어야했던 고뇌와 갈등, 그리고 분노의 족적을 선명히 드러내주는 한 편의 지성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90년대적 성공’의 뒤안길
창작과비평사, 사계절, 동녘, 두레, 돌베개, 청년사 같은 ‘운동권’ 출판사가 새로운 시대지형에 무난히 적응한 것은 그러한 “고뇌와 갈등, 그리고 분노”가 맺은 결실일까. 때로는 운도 따랐을 것이다. 『반갑다, 논리야』를 포함한 ‘이야기로 익히는 논리 학습’ 시리즈(사계절, 1992)가 밀리언셀러가 될 줄은 책을 펴낸 출판사도 전혀 예상 못했으리라. 때로는 모르는 이의 은혜도 입었다. 판매대를 관리하는 중대형서점의 여직원들이 운동권 출판사의 신간을 배려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한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집필한 ‘창작과비평사론’(미발표)을 통해 고난 끝에 일군 알찬 수확을 ‘90년대적 성공’이라 칭한 바 있다. 인적자원의 풍부함, 깔끔한 편집, 깐깐한 잣대 등을 성공의 동력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소설 동의보감』으로 시작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역사 앞에서』『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어진 다량 판매 행진을 그런 ‘창비다움’의 결과로 보았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없지 않았다. 계간 <창작과 비평> 머리글을 통한 실질적 발행인의 경쟁력 제고 선언과 중복 출판물의 급증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은근한 수요예측에 따른 출판과 시류에 영합하는 선정주의가 고개를 들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만개한 90년대 초중반
1990년대 중반엔 창작과비평사, 김영사, 해냄, 이 세 출판사가 삼두마차를 형성한다. 1980년대 후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터트린 김영사는 줄곧 성공한 인물의 출세기와 성공을 위한 실용서 만들기에 힘쓴 결과,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1995년에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과 『신화는 없다』를 목록 상위권에 올려놓으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여자의 남자』로 베스트셀러 출판사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해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기어이 큰일을 해내고 만다. 그리고는 『태백산맥』의 판권을 확보하면서 『아리랑』까지 베스트셀러 행진을 이어간다.

돌이켜 보니 90년대 초중반 책이 참 잘 팔렸다. 출판사는 너나없이 베스트셀러를 펴낸다. 살림출판사는 양귀자의 대중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천년의 사랑』이, 열린책들은 『개미』와 『좀머 씨 이야기』가, 시공사는 존 그리샴의 추리소설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높은 판매고를 올린다. 둥지의 『세상을 보는 지혜』, 삼진기획의 『소설 목민심서』, 열림원의 『서편제』, 세계사의 『영원한 제국』, 지식공작소의 『일본은 없다』, 웅진출판의 『고등어』, 문이당의 『아버지』 등도 베스트셀러 대열에 가세한다. 김정현의 『아버지』는 200만부가 팔려 낱권 판매 신기록을 세운다.


필자는 한때 1990년대 초중반의 출판호황은 호경기와 맞물린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호경기가 베스트셀러를 양산했다는 기계적 사고는 이후 산출된 베스트셀러와 경제 호/불황과의 연관성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현재로선 1993년을 앞뒤로 하는 시기가 한국경제의 마지막 호황기이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는 시각을 교정했다. 90년대 초중반은 베스트셀러가 쏟아진 최초의 국면이다.

IMF를 앞서 맞다
1990년대 중반이 지나자 출판계와 출판인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상투어를 입에 달고 살게 된다. 1996년 중소규모 도매상이 하나 둘 쓰러지면서 시작된 출판도매상의 줄 부도사태는 국가재정파산선언 직전 대형도매상들까지 넘어지면서 출판계를 거의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무렵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대책회의에는 연일 출판인들로 북적였다. 참석자 중 거의 흑 빛이 된 어느 출판인의 얼굴이 뇌리에 남아 있다.

도매상 연쇄부도는 책을 많이 판 출판사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선택』을 펴낸 민음사, 『람세스』를 출간한 문학동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이레가 그런 출판사였다. IMF 구제금융체제의 찬바람은 비단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전문지와 자유기고가의 생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주간 <도서신문>을 인수한 웅진출판은 1997년 7월 21일자부터 1998년 8월 17일자까지 더도 덜도 아닌 1년간 신문을 내고 접었다. 1998년 새해가 밝자 어느 교육출판 업체는 필자의 그 회사 사보 독서칼럼을 없애면서 필자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사보에 안 실린 원고료를 받긴 했다. 담당자가 재량을 발휘한 것 같았다.

서평전문지 <출판저널>은 연대가 저물 때마다 지난 10년 동안의 출판을 결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1999년 12월 5일자(제270호) 송년특집 증면호에서도 어김없이 각 분야 전문가 108인의 추천을 받아 ‘1990년대의 책’ 77권을 선정, 발표했다. “선정기준은 ’90년대 우리 지성사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책으로, 공중적 수준의 계몽적 역할에 기여한 책도 포함했다.”

1990년대의 책
77권을 분야별로 나눠놨는데 문학에선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창작과비평사 등 문학전문 출판사 네 곳에서 출간한 책의 비중이 90퍼센트를 넘는다. 역사학은 일조각(『가야연맹사』), 지식산업사(『서양의 지적 운동』), 한길사(『한국사』), 까치(『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청년사(『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와 『우리 여성의 역사』), 문학과지성사(『고양이 대학살』), 서울대출판부(『중국 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등이 고르게 분포한다.

경제학 분야는 1990년 완역된 비봉출판사의 『자본론』, 한마음사의 『역사의 종말』, 영림카디널의 『세계화의 덫』이 눈길을 끈다. 과학 분야 선정도서에선 세월의 흐름을 느껴진다. 세 권 가운데 두 권, 그러니까 범양사출판부의 『가이아』와 동아출판사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간행처가 바뀌었다.

최성일 /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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