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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魂과 만나려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魂과 만나려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1.29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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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만나다]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서울대출판부) 펴낸 조수철 서울의대 교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 부조가 걸려있고, 그 주변으로 세계적 거장 지휘자 블룸슈테트의 베토벤 전집과 고전 음악가들의 흉상이 옹기종기 진열돼 있다. 책상 옆으로 우뚝 자리 잡은 오디오에서는 백건우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선율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병동의 한가운데 위치한 신경정신과 과장의 연구실 전경이다. 책장에 꼽힌 책들의 제목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이 방의 주인이 정신의학자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주인공 조수철 서울대 교수(사진·58세)의 베토벤 사랑이 여기저기 묻어나는 공간이다.

조 교수의 베토벤 사랑은 단순한 취미 이상이다. 2002년에 펴낸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서울대출판부)와 최근작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서울대출판부)는 베토벤의 삶과 연관해 그의 음악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해 교향곡, 후기 현악 4중주곡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일간지에 ‘베토벤 이야기’를 연재하는가 하면, 베토벤협회 학술이사까지 맡고 있는 자타공인 최고의 베토벤 전문가다. 
그렇다고 그를 의학자로서 본분을 망각한 ‘게으른’ 연구자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국내 의학계에 ‘소아정신’ 분야를 개척, 소아 정신질환의 기준과 척도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에는 조 교수의 연구팀이 세계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에서 최우수 포스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폐 장애의 뇌기능적 이상을 뇌 혈류검사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자폐장애의 이상을 규명하는데 기여했다는 공로다. 현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의학계에서도 왕성한 활동과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樂聖’에 미쳐 성적도 학년 꼴찌

조 교수와 음악의 첫 만남은 매우 단순한 동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원하는 학교는 가야겠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어요.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음악이었죠.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끝나는 순간까지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가요, 팝송 등 숱한 장르를 제치고 클래식을 선택한 것도 “판을 갈지 않고 오랜 시간 앉아 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클래식의 여운은 그를 더욱 깊은 세계로 이끌었다. “대학 합격 선물로 FM 라디오를 사달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거 하나 갖는 게 엄청난 꿈이었죠. 그리고는 서울에 올라와 학창시절 6년 내내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부터 현대음악까지 닥치는 대로 다 들었어요.”

그가 클래식 중에서도 베토벤에 ‘푹’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 본과 2학년 시절 참석한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였다. 당시 개최된 베토벤 기념 연주회와 행사의 자극은 그로 하여금 베토벤에 성큼 다가가게 했다. “매일 판으로만 듣다가 실제 연주하는 장면을 듣고 보니 그 감동은 비교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는 1년 내내 열심히 좇아다녔죠. 내일이 시험이라도 오늘은 달려갔으니 성적도 그 학년에서 제일 엉망이었어요. 아직도 아무리 음반이 좋다해도 조금은 엉성한 실제 연주가 훨씬 강한 인상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조 교수는 지금은 불타 없어져버린 서울시민회관을 들락거리며 베토벤의 세계를 파고들었다. 동전 한 푼이 아쉬운 학창시절, 수위아저씨에게 담배 값을 들이밀며 인터미션 시간에 숨어들어가 열심히도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자극에 대해서는 싫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베토벤의 자극은 계속 새로운 것으로 다가왔어요. 듣다보니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삶을 알지 못하면 음악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찾게 된 베토벤의 자료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하나씩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조 교수의 베토벤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서 삶으로 이어졌다. 베토벤의 저서는 가리지 않고 구해봤고, 베토벤의 발길이 닿았던 곳은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책의 기획을 위해 일부러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외국에서 학회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했어요. 그리고는 시간 여유가 있으면  살던 곳, 무덤, 기념관 등을 족족 찾아다녔죠. 베토벤에 관해서라면 그곳에서 10년 산 사람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거예요.”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에 수록된 베토벤의 가계도와 스승의 사진들, 베토벤이 머물렀던 장소의 사진들이 그의 엄청난 노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지만, 이것이 그가 모은 자료의 1%에 불과하다니 그야말로 조 교수 자체가 베토벤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여태까지 ‘듣기’의 방식으로 베토벤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그에게 어느날 베토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베토벤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베토벤이 의학자의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음악과 전공이 따로따로 갔지만, 베토벤이 내 학문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것을 알았어요. 베토벤의 심성발달과 그의 음악적 표현 사이에 상관성을 논문으로 발표했죠.” 이후 집필된 관련 논문과 저서들은 음악세계와 정신의학세계를 넘나드는 그의 연구 결과물이다.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들: 발달학적 측면’은 다름 아닌 <정신의학>에 게재된 논문이다.

그의 연구에 음악계도 진지하게 반응했다. 지난해 베토벤 순례를 마친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는 우연히 조 교수의 책을 접하고, 부인 윤정희씨를 통해 직접 조 교수를 자신의 연주회에 초청했다고 한다. 1990년 출간된 이순열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의 『베토벤』(삼성출판사),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의 『베토벤 평전』(가산출판사, 2003) 이외에는 베토벤의 생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연구서들이 많지 않았던 현실에서 조 교수의 책은 음악계에 적지 않은 의미를 던졌다. “실제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지휘자나 연주가들로부터 악보 뒤에 숨어있던 인간의 심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의학과 예술’, ‘조수철의 음악 이야기’ 등을 주제로 강연도 다니면서 단연 ‘베토벤 권위자’로 자리를 굳혔다.
이번 저작에서 조 교수는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새롭게 베토벤의 음악을 해석했다. “베토벤 작품의 발달과정과 의미를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음악 사상의 핵심은 ‘對極의 合一’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극과 극이 하나가 된다는 ‘대극의 합일’ 개념을 베토벤 음악의 핵심적인 지향점으로 봤다. 예컨대 교향곡 9번 ‘합창’은 베토벤 이전의 모든 작곡가들이 구분하던 성악과 기악의 곡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이며, 교양곡 6번 ‘전원’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평화로운 모습을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또한 도를 통해 세상 만물이 하나가 된다는 노자의 得一사상과, 무한한 거리에서 보면 가까이서 보는 상대적 차별성은 없어지고 보편타당성이 성립된다는 장자의 萬物齊同 사상 등 동양사상과 베토벤이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고 설명한다. “대극의 합일이라는 개념은 모든 일상생활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줍니다. 선생은 학생들이 필요로하는 강의를 해야지, 좋은 강의를 아무리 어렵게 해봐야 쓸모가 없습니다. 대극적 관계를 지양하고 각기 다른 입장의 접점을 찾아갈 때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상태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대극합일의 강조는 그가 말하려는 베토벤 음악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서울·지방, 진보·보수로 나뉜 지금의 현실에 베토벤의 음악사상은 성숙한 사회로 갈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베토벤의 지향은 대극의 합일입니다”

조 교수는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 외래 진료에서 어린 아이들을 상대하는 그는 가운을 입지 않는다. “흰 가운은 의사의 상징으로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어요. 아이들과 의사가 서로를 이해하고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어야 좋은 치료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치되는 서로의 관계를 조금씩 메워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듣고, 보고, 쓰고, 말하면서 베토벤을 알아왔지만, 조 교수는 아직도 허전함을 느낀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 바로 경험을 통한 느낌이 빠져있었다. “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 사람의 혼과 만나기 위해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역시 쳐보니까 새로운 기쁨이 생기는 것 같아요.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그나마 제일 쉬운 19번을 치는 것이 지금의 목표입니다.”

조 교수는 베토벤의 끝없는 음악적 깊이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어린이용 베토벤 저작이 곧 출간되며, 베토벤의 발자취를 좇으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화보집도 펴낼 계획이다. 그는 이 와중에도 최근 동료들과 앤드류 스텝토의 『천재성의 마음』(학지사)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베토벤에 이르는 조 교수의 마지막 단계는 자신이 베토벤을 만나온 과정을 ‘조수철이 만난 베토벤’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 세계와 조수철의 의학 세계가 ‘합창’의 시너지를 마구 발산하기를 기대한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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