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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옛길에서 떠돎의 황홀에 흐느끼다
문득 옛길에서 떠돎의 황홀에 흐느끼다
  • 교수신문
  • 승인 2007.12.3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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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으로 가는 동안거

□ 하늘재를 지나 포암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풍광. 겨울 늠름한 절경이 강렬하다.

삶과 땅의 사실

오늘의 한반도 안에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 가서 쉬고 꿈꾸고 동시에 삶과 땅의 사실을 새길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한반도 이곳과 저곳을 나눌 수 없을 만큼 길은 숱하게 뚫려있고 이어져 있다. 깊은 산속 오지라고 불렸던 숨겨진 아름다운 곳도 모두 드러난 터라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을 냉연하게 쳐다볼 수도 없게 됐다.

90년대 이후, 우리들의 떠돎은 천박해졌고, 떠돎의 고통과 황홀을 옮겨적은 빼어난 기행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떠돎의 고통도 반감됐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황홀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모두들 삶의 호흡은 충실하고 소박해졌지만, 가쁜 호흡으로 마을을 찾아 길을 걷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많은 주름을 잡은 산을 오르는 몸부림의 기억은 몸에서 사라졌다.

연한 푸른 싹을 내보일 겨울 보리밭을 본 적도 오래됐다.

교수신문은 내게 교수들이 冬安居할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동안거는 말이 그렇지, 겨울방학동안 학교와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서 낯설게 느끼고 사유하라는 권유가 아니겠는가. 70년대 중반에 쓴 소설가 박태순 선생의 글로 기억하는데, 紀行은 생의 사실과 지리의 사실이 고통스럽게 엉켜있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땅과 삶의 조화가 학문의 목적이라면, 동안거와 같은 기행은 학문하는 이들이 이곳저곳으로 흘러 다니면서 삶과 땅의 괴리를 제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가도가도 산 속에 갇힌 마을과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굴곡과 같은 길의 흔적을 얼굴에 새기고 사는 이들을 만난 적도 참 오래됐다. 따라서 함께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들의 삶의 형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어려워졌다. 엉터리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곰을 키운다며, 훼손된 곳을 복원한다며 산의 길들을 막아놓아, 야영을 하면서 버너를 켜서 밥을 해먹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일도 자꾸만 줄어든다.

느릿느릿 어둠이 깃들면 하룻밤 신세질 산골 집을 찾던 일도 이제는 어슴푸레하다. “과거의 냄새와 옛날의 반짝임”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렇게 썼다. “싫증나기는커녕 이 세상 어디서나 나를 사로잡는 이런 것들에 대한 취향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동안거하기 좋은 곳은 옛길이 있는 곳이다. 옛길은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라서 길로서는 이미 죽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옛길을 걷는 것은 가장 오래된, 길의 조상을 찾아가는 일이다. 삶의 흐름은 시간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지만 원천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비록 옛길이 보잘것 없는 길이지만, 삶이 용출됐던 길임에는 틀림없다. 옛길은 산에도 있고, 섬에도 있고, 내가 살던 옛 동네에도 있다. 어떤 곳을 간다는 것은 그곳에 가기 위하여 이곳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곳의 바깥으로 간다는 뜻이다. 동안거도 하나의 여행이다.

이는 이 세계로부터 다른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곳에 즐거움이 있고, 황홀경이 있다. 라틴어에서 ‘나간다’와 ‘황홀경’은 어원적으로 같은 단어이다. 밖으로 나갈수록 자신에게 낯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모든 사물들과 접속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오지가 아닐지라도 떠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출구와 같다.

그러므로 떠날 때는 떠나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떠나는 일은 돌아오는 일만큼 필연적이다. 아니 돌아오는 일보다 훨씬 더 돌발적이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

□ 해남 달마산의 주봉. 저 아래 어란마을이 바다와 잇닿아 있다.

 

문경, 관음리 하늘재 _ 옛길의 정취

남한에서 가장 유명한 옛길을 걷기 위해서는 문경으로 가야한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이으면서 서울로 향하는 내륙의 중원이기 때문이다. 문경 지역에는 옛길이 참 많다.

문경이라고 말하면, 다들 새재를 떠올린다. 이름하여 문경새재. 많은 이들이 쉽게 가 본 것처럼 말하지만, 문경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문경은 말하지 않는 침묵의 땅이다. 문경에 가면 새재 뿐만 아니라 숱한 고개를 볼 수 있고, 그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게 된다.

문경은 우리나라 길의 근원과 같은 모습을 지닌 옛 고장이다. 문경은 이 땅의 중원이라 남쪽에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터라 산과 고개가 많았다. 지금까지도 그것을 감출 수가 없다. 문경에 가면 길을 잃기 쉽다. 문경의 숱한 산과 고갯길들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말을 타고 오르거나 걸어서 올랐던 길들이 지금도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 오래된 길을 걷다보면 매 순간 전율하게 된다. 문경의 산 속에 있는 오래된 길들은 인간의 숨결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추천하는 동안거 장소는 문경읍 관음리와 미륵리이다. 이 두 마을을 잇는 하늘재는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고, 역사가 깊은 길이다. 하늘재, 이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만나고 헤어졌을까. 하늘재는 하늘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만 같은.

그러나 가풀막이 없는 얕은 고개이다. 관음리에서 부드러운 눈시울과 같은 자드락길을 따라 하늘재에 오르면 문뜩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하늘재에서 이 길과 결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하늘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참 아름답다. 이렇듯 하늘재 옛길은 근원에서 올라 근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관음리에서 시작한 발걸음이 하늘재 마루에 이르자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옛길을 포장해 놓고 옛길과 결별한 문경시의 태도를 생각했다. 문경시는 하늘재 아래 마을인 관음리에서 하늘재까지 아스팔트로 길을 덮었다. 반대편 충주시는 푸서리가 많은 하늘재 옛길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늘재 옛길의 최후의 모습대로 남겨두었다.

인문학적으로 보면 충주시가 문경시보다 훨씬 위다. 길이 정신과 정신의 만남, 감각과 감각의 만남, 이쪽과 저쪽의 의사소통이라면, 문경시는 그것을 땅 속에 묻어버렸고, 충주시는 잊혀진 옛길을 경험하도록 했다. 충주시는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소통했던 이 길을 그대로 갈망했고, 문경시는 그것과 결별하고자 했다.

해남, 달마산 어란마을 _ 땅끝의 울음

너울이 치는 바다는 자연의 터이되, 아주 원초적인 장소이다. 그곳에 가면 옷을 입기 보다는 벗는 것처럼. 바다에 가면 무한의 인상들, 무한의 이미지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지평선과 같은 너른 바다와 높은 하늘이 하나의 점과 선으로 맞닿아 있는 형체들인데, 이것들마저 고정된 형상보다는 어떤 이미지들로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흔적은 없지만, 비정형의 흔적들을 남긴다.

그것은 바다가 자기형태를 유지하기보다는 중력에 순응하려는 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프랑시스 퐁주의 시처럼, “희고, 빛나고, 무정형이고, 시원하고, 수동적이”고, “에두르고, 뚫고, 녹이고, 스며들고…가라앉고, 매순간 어떠한 형태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려고만 하고…언제나 낮게” 흐르는 물의 총체이다.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몽상이다. 예컨대 바다에는 하늘이 두 개있다.

하나는 바다에 비추어진 머리 위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 끝에 맞닿아 있는 끝없는 하늘이다. 하늘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바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기 때문에 실은 하늘이 두 개, 바다가 두 개가 된다. 하늘 속 바다는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바다 속 하늘은 생선비늘처럼 빛난다. 바다를 병풍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바다 앞에 서게 되면 존재감이 작아지는 탓도 있지만, 자신을 비추이는 거울이 남보다 한 개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하늘에서도 보고, 바다에서도 읽는다. 바다는 모든 상실된 것이 도도하게 흘러 최종적으로 모여드는 곳이다. 사유하다라는 라틴어 speculatio, speculation의 어원은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망루이다.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늘 눈을 내리깔고 바라본다. 바다는 그래서 상실의 총화이다. 바다에 오면 사람들은 땅의 일부처럼 자신의 상실을 거푸 새길 수밖에 없다. 바다는 높이가 아니라 깊이를 지닌 명상의 터이다.

땅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땅이 아닌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똑같은 삶이 아니라, 늘 보는 대상이 아니라 멀리, 다른 공간에서 헤매고 싶을 때가 있다. 바다는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이다. 바다 한 가운데 섬이 있다. 바다는 무한하다. 뭍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바깥이되, 상상력이 무한히 커지는 표징이다. 바다를 발음하면, 닫혀있다는 느낌을 주는 섬과 달리 확 열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다의 풍경은 섬과 더불어 웅대한 그 무엇이 된다.

우리나라 맨 아래 해남의 달마산부터 속초의 설악산까지, 집들이 나락드락 자리잡고 있는 바닷가 마을에 서서 등을 돌려 산을 올려다보면 산은 참으로 낮게 보인다. 산도 겸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시 등을 돌려 바다를 보면 표면은 어릴 적 교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으로 눈부신 비닐 책받침 같다. 해남에는 야트막한 산과 바다가 실매듭처럼 붙어있다. 매듭과 매듭 사이가 우리나라 지도의 맨 가장자리가 된다.

바다가 눈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싶으면 커다란 방죽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손거울처럼 가로놓여 있다. 달마산 아래 어란 마을도 시도때도 없이 물에 거꾸로 잠긴다. 봄과 여름 사이, 마을이 바다 겉면에 봄바람에 가지 떨 듯 흔들리고 있었다. 바다의 테두리는 밭과 붙어있다. 배추밭과 파밭 사이사이에 죽은 이들의 영원한 집인 무덤들이 있다.

후손들이 물 가장자리가 명당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여기서는 만나는 모든 것이 서로 포개져 납작해진다. 길과 사람, 마을과 산, 죽은 자와 물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붙이처럼. 땅에서 바다로 향한 길은 미끄러지듯 이어지고 굽어 돈다. 산모퉁이를 돌면 길이 바다와 이어지고, 바닷가를 따라 난 길과 집은 물길처럼 낮게 포복하고 있다. 산과 마찬가지로 해남부터 속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바닷가는 변방에 우짖는 민중들이 살던 곳이었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졌고, 지방 관리들의 탐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뭍에서 바다로 도망치는 곳이기도 했으리라. 해남 옆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은 그의 『다산시선』에서 ‘哀切陽’이라는 시로 백성들의 고통을 읊었다.

우리나라 바다와 바닷가 마을들을 구석구석 가보기 위해서는 한 마리 낙타처럼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 제 스스로 길이 돼 삶의 옥답과 사막을 두루 걸어가듯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허약한 두 발은 짐승의 네 발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 소설가 정찬의 말은 바닷가를 걷는 모든 이들에게 절실하게 울린다. 혹독한 부역과 진상에 시달린 민중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삼자면 바닷가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만약 동안거하면서 따뜻한 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다면, 나는 단연코 해남의 어란마을로 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바닷가 마을들은 대개 바다와 맞닿아 있는 꼬랑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갈라져서 나온 뾰족한 끝머리란 뜻의 갈머리, 갈곶에 있다. 여기에는 땅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와 싸워 자신들이 생계를 지키는 삶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 민낯의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난다면, 바다에서 막 거두어 온 해파리, 미역 등을 손쉽게 얻어먹을 수 있다.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귀동냥할 수 있다. 바람이 멎는 순간, 따뜻한 볕이 바다 표면을 반사해서 내 안으로 물밀 듯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늦은 저녁때라면 바닷가 마을사람들은 구성진 뱃사람들의 노래도 불러재낄 수 있다.

바닷가에 사는 늙은이들은 바다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뒤안길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삶의 시름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바닷가 마을은 낮은 곳에 있다. 그곳에서, 참으로 바람과 볕이 달고 맛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바닷가 마을길을 걸으면서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바닷바람과 햇볕에 내 몸이 경황없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아, 그곳에 가면 참 좋을 것 같다. 호흡…… 벌써 숨이 차다. 숨이 달다.

안치운 / 호서대·연극학과(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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