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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대중문화의 딜레마로 미끄러지다
신학, 대중문화의 딜레마로 미끄러지다
  • 이택광 영국통신원
  • 승인 2001.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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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7 09:50:55
신학은 대중문화와 어느 정도 겹칠 수 있을까? 최근 영국에서 불 붙고 있는 신학계의 ‘해리 포터’ 논쟁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줄 것 같다.

최근에 영화화까지 된 조앤 롤링의 소설 ‘해리 포터’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 9천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판타지 소설이다. 이미 올해 9월에 영국 켄트의 차트햄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초등학교의 교장 캐롤 루크우드는 학교 도서관에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비치하는 것을 금지시킨 바 있다. 루크우드 교장은 “성서는 마법사와 마귀, 그리고 악마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말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입장이 또한 켄터베리 성당 관계자들로부터 제기되었는데, 이들은 소설 ‘해리 포터’에 주로 등장하는 이방 종교적 이미지가 교인의 반발을 사고 있기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로 제작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교구 내에서 개봉하지 못하도록 반대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실질적으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개봉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오히려 문학 텍스트를 일차원적으로 해석해서 무리를 빚은 한편의 해프닝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일부 기독교계의 움직임에 대한 신학자들의 대응이었다. 브리스톨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의 학장 브리저 박사는 ‘해리 포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평면적인 것이며 오히려 ‘해리 포터’는 아주 심오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최근 출간된 ‘해리 포터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주장한다. 그는 ‘해리 포터’를 유명한 영국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였던 C. S. 루이스의 ‘나르니아’시리즈와 비교하면서 ‘해리 포터’는 성서의 복음서와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서사 방식을 주조해냈다고 말한다. 브리저 박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작가 롤링이 지극히 도덕적인 작가라고 하면서 ‘해리 포터’가 기독교적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작기 희생이나 자비, 그리고 사랑의 힘과 같은 신학적 덕목을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성서 복음서 해독을 위한 이방적 서사의 도입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당시의 대중적 담론이었던 제우스 이야기를 자신의 복음전도를 위해 차용한 실례를 들면서, 대중문화와 대화하려는 자세야말로 신학적으로 적극적인 태도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옥스퍼드의 신학자 리처드 토마스도 ‘해리 포터’라는 판타지가 가진 두 가지 속성을 거론하면서 기본적으로 이 소설에서 항상 악은 자기 희생을 하는 선에 의해 패배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반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변호하고 있다.

이처럼 ‘해리 포터’라는 대중문화 현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신학계의 논쟁은 어떻게 보면 급격하게 변동하는 현실 문화에 대한 종교적 곤혹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논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중문화와 신학적 관계는 단순하게 신념의 차원을 넘어 이제 바야흐로 해석의 임계상황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다. 기의로부터 미끄러지는 기표라는 철학적 딜레마를 신학도 이제 피해갈 수 없게 된 것일까.
이택광 / 영국 통신원·셰필드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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