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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욕 좀 먹더라도 국가비전 세울 사람 없나요?”
“당장 욕 좀 먹더라도 국가비전 세울 사람 없나요?”
  • 김봉억 기자
  • 승인 2007.11.05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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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국산책’ 50회 연재 마친 이중 전 숭실대 총장

이중 전 숭실대 총장
“중국을 읽고 한국을 생각한다.”
지난 2006년 3월 6일자부터 지난주까지 ‘이중의 중국산책’ 50회 연재를 마친 이중 전 숭실대 총장(사진)은 “글의 행간이나 문맥 사이사이에서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간절함과 안타까움 같은 것이 묻어나기를 바랐습니다”고 했다.

‘중국산책’은 이 전 총장이 지난 2002년 펴낸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에서 못 다한 중국 근·현대사와 주요 인물들의 秘史와 함께 그의 忠情을 담았다. 그는 이 연재물을 쓰는 1년 반 동안 상해와 연변에서 반 이상을 보냈다. “이번 연재물은 순수한 학술논문도 아니고 전적으로 기행문도 아닙니다. 다만, 소재도, 관점도, 구성도 가능하면 문체도 좀 색다르게 해보자고 의욕을 보였습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와 부총장을 지냈고, 중국혁명의 근거지를 찾아 50일 이상 답사를 하고, 또 수십 차례 다녀왔지만 그에게 중국은 “전적으로 모를 나라”다. 하지만 “몰라서도 안 되는 나라”다. “달나라에 위성을 보낼 수 있는 중국의 힘과 시스템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그들의 지향과 목표, 시스템, 의지 같은 것을 읽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전 총장이 ‘중국산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양당 정치, 또는 다당제를 하고 있지만 그런 제도적 장점을 살려나가면서도 국가장래에 대한 비전이나 현실 인식에 있어서는 대국적으로 어떤 일치를 보는 성숙한 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정당이나 대선 후보들이 당장은 욕을 먹고 심한 반발에 부닥치더라도 국가 목표와 지향, 인재 육성과 관리 등 21세기 한국이 가야할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30년을 두고 인재를 육성한 중국과 중국 지도자들의 결단과 헌신성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1959년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던 이 전 총장은 이번 연재물을 쓰면서 “글 쓰는 재미가 늘었다”고 했다. 한 동안은 책 쓰는 데 전념할 계획이다.

올해는 그에게 풍성한 해가 될 듯싶다. 이번 ‘중국산책’ 연재 글은 지식산업사(대표 김경희)에서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시집도 한 권 내놓는다. 지난해엔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를 중국 베이징 인민출판사에서 중국어판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일문 일답 전문이다.                   
 
△ 지난 2006년 3월부터 1년 6개월 넘게 ‘이중의 중국산책’ 연재를 하셨습니다. 50회로 연재를 끝낸 소감부터 듣고 싶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엔 50회 분량 정도면 제법 넓고 푸짐한 마당 같다는 생각을 하고 조금 아득하다는 느낌도 있었지요. 그런데 막상 종결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에요. 어디 들어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제가 그런 심보 같아서 미안하네요. 2006년 3월부터 연재가 되었지요. 시작할 때엔 격주간이다가 나중에 매주 연재로 바뀌었는데, 사실 원고에 쫓기기는 별 차이가 없어요. 작년 한해는 상해서 지냈고, 올봄부터는 연변을 자주 다니는데 이메일로 원고 보내는 재미도 있지요. 편집진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웃음)”

△ 중국 근현대 역사와 주요 인물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전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번 연재물은 순수한 학술 논문도 아니고 전적으로 기행문도 아닙니다. 요즘 말로 ‘퓨전’이라 할까요. 더러 책방에서 중국 관련 서적들을 보는데, 대체로 정면에서 다루고 있지요. 목차나 순서도 대개 정해져 있고. 저로서는 뭔가, 이런 것으론 만족 못 할 부분이 있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연재에서는 素材도, 觀點도, 構成도, 가능하면 文體도 좀 색다르게 해보자고 의욕을 보였고, 울림도 달랐으면 하고 기대를 했었는데,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선생님께서 이 연재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로서 고려해본 포인트가 있다면, 독자인 한국 사람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중국을 읽고 한국을 생각한다, 이런 글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글의 행간이나 문맥 사이사이에 저 나름의 충정이랄까,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간절함과 안타까움 같은 것이 묻어 있었으면 합니다마는. 글쎄요.”

△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고, 한국에게도 주요한 교역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21세기에 중국은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神舟를 쏘아 올리고 이번에 상娥 1호를 달나라에 보낼 수 있는 중국의 힘과 시스템, 사실 우리는 이걸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과학기술면에서 중국이 앞서가고 있다는 결과만 가지고 봐서는 안됩니다. 지난 10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를 보는 시각처럼 그냥 권력 투쟁이나 하고 그 향배가 어찌 되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한, 우리가 중국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국은 10년 대동란이라 할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어요. 그 아수라판에서 뒤로는 국익을 위한 각종 프로젝트들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리고 1972년에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것도 마찬가지죠. 이번에 한국의 언론들은 매일 후진타오와 장쩌민이 권력을 두고 힘 싸움을 한다는 기사로 도배를 했었지요. 도표를 그려서 누구 편이 몇 명이고 누구는 누가 미는 사람이고 등등, 물론 그런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분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지향, 목표, 시스템, 국가 의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최근에 와서 부쩍 중화민족의 부흥을 외치는데, 이런 것도 구체적인 플랜이나 그걸 작동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에 이상이 있으면 추진이 안 되는 거죠.”

△ 아직도 중국은 알다가도 모르는 상대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중국은 어떠 나라 입니까.
“‘전적으로 모를 나라가 중국’이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정답입니다. 1989년에 처음으로 중국 구경을 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충고를 해 주었어요. 자기가 본 중국의 어느 한 국면만 가지고 중국이 이렇다 저렇다 일반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어떤 곳이나 장면을 보았다, 그것만 있는 그대로 옮기면 되지, 바로 이것이 중국이다, 중국의 현실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역사가 긴 자기네  나라에 대한 프라이드나 자만심 같은 것이기도 해요. 중국의 융통성이라 할까, 신축자재한 모습들을 역사에서 많이 보지요. 중국은 자기네 王朝史에 몽골민족의 元나라, 만주족의 淸나라를 넣고 있어요. 최근에 와서 중화민족 운운하는 걸 보면 웃긴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늘날 중국의 엄청난 땅덩이도 알고 보면 청나라 때 거의 국경을 확정지은 것들이지요. 다시 되찾았다고 할까요.”

△ 지난 10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차기 지도자로 5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들이 대거 부상했는데요. ‘중국산책’ 마지막 연재글에서 이들이 전면에 부상한 배경에는 중국 대학교육 시스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어느 나라나 국가 엘리트 산출 기능이 어떤가, 그런 시스템에 대해 관심을 갖기 마련이지요. 이번 전당대회에서 5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들이 대거 상층부에 진입했고,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强) 두 사람은 정치국 위원을 안 거치고 바로 상무위원이 되었어요. 그리고 5년 뒤엔 이 두 사람이 국가 주석과 국무원 총리를 맡게 되어 있어요. 5년 뒤에도 채 60이 안 되는 나이입니다. 근래에 와서 중국은 엘리트, 당과 정부의 간부들을 단련시키고 있다고 할까. 혁명화, 지식화, 전문화, 그리고 年輕化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어요. 50대 지도 그룹이 바로 이런 덕목에 다들 해당되는 사람들이지요. 특히 77, 78, 79학번이 주목받는 것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황폐화된 대학 교육이 바로 잡힌 첫 해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 당시 역사적 배경도 궁금한데요.
“1976년 9월에 모택동이 죽었습니다. 이어 악명 높던 4인방이 타도되었습니다. 그해 7월에 또다시 숙청되었던 등소평이 복귀하고 실세로 등장합니다. 등소평이 ‘대학 입시’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高考 恢復”이야말로 개혁개방의 추진에 없어서는 안 될 새로운 인재, 국가 엘리트를 배양하는 시스템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나이 들어서, 예를 들면 농촌이나 광산, 공장 등지에서 5~6년, 7~8년 씩 생고생을 했던 젊은이들이 비로소 정규 시험을 통해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0년간 꾸준히 인재를 배양해온 결과로서, 50대의 국가 지도자 그룹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한국에는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보십니까.
“재미있는 얘기를 해 볼까요. 중국의 左파는 사회주의 경제 고수파입니다. 右파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지요. 등소평이 초기에 이 두 그룹의 갈등에 애를 먹었지요. 양 날개를 잘 다독거리면서 시장경제를 추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의 심복이었던 호요방과 조자양을 정치적으로 희생시키기도 했어요. 한국은 건국 이래 전통적으로 자유경제와 시장경제를 하면서 이른 바 우파가 정권을 맡아왔어요.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 양극화 등 자본주의 경제의 구김살을 문제 삼아 강한 정치투쟁이 일어났었고, 현재의 정권, 범여권의 주장 역시 좌파적 시각과 투쟁 의지가 강해요. 그런데 중국은 공산당이라는 한 정당 내에서 양 날개를 잘 조화시켜 나가는 인상입니다. 先富論에서 共富論으로, 거침없는 성장에서 和諧社會論으로, 그리고 이번 후진타오가 밀어붙인 科學的發電觀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빈부격차 해소, 의료, 교육, 환경, 취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문제를 해소 내지 축소해가는 노력들을 보이고 있지요. 우리는 양당 정치, 또는 다당제를 하고 있지만, 그런 제도적 장점을 살려나가면서도 국가장래에 대한 비전이나 현실 인식에 있어서는 대국적으로 어떤 一致를 보는 성숙한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마는, 중국 사람들이 보이는 原則性과 靈活性은 정말 대단해요. 원칙은 지키되 현실적으로 융통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서 국면을 타개해 나가는, 그런 모양들을 많이 보아요. 어떻게 보면, 중국 공산당은 자기네 정체성을 위해서 공산당을 지키고 있어요. 그러면서 국민 생활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사회주의에 배치되는 시장경제를 도입해서 재미를 보고 있지요.”

△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보시면서 우려할 만한 점은 없습니까.
“오늘의 정치판은, 건국의 정통성, 국가운영의 원칙성을 심하게 훼손시키고 있지요. 성장 못지않게 배분의 문제도 심각하다는 것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거지요. 그걸 가지고 정치투쟁으로 연결시키고 국민을 양쪽으로 갈라서게 해서 득표 요인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원칙성을 무너뜨리고, 영활성 자체마저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 전직 대학총장으로서 중국의 시스템 가운데 ‘교육’ 부분도 눈여겨 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중 전 총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의 길지 않은 경험에 비춰 볼 때, 다소 암담한 심경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이 정치투쟁, 정치 싸움의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불이니 3불 반대니 하는데, 이것도 자칫 형식논리로,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로 타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론 현 정부가 그러한 싸움의 단초를 만들다시피 했고, 그걸 정치에 활용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교육만은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21세기에 한국이 가야 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방향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목표와 지향, 인재의 육성과 관리, 이런 것을 두고 어떤 정당이나 후보들이 시원하게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는지요? 당장은 욕을 먹고 심한 반발에 부닥치더라도 말입니다. 중국은 개혁개방하면서 대학 입시 부활하지 않으면 사실상 砂上樓閣이지요. 30년을 두고 인재를 배양한 중국을, 중국 지도자들의 결단과 헌신성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길은 뻔한데, 참으로 어렵네요. 우리 모두가 책임을 공유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공통된 반성의 토대 위에서 이제 새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막연한 이야기입니다마는…….”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공직이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써 왔습니다. 이번에 교수신문에 50회나 되는 연재를 하다 보니, 글 쓰는 재미가 늘어난 것 같아요. 한동안은 책 쓰는 데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물론 중국을 오가면서 나름대로 자료도 더 모으고 할 것입니다. 작년 한해는 상해에 있었고, 올해부턴 연변에서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시집도 올해 안에 낼 예정인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1959년에 월간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으로 시단에 나왔거든요. 이번에 시집을 내면 네 권 째가 됩니다. 함께 詩選集도 낼까 합니다. 참, 교수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조금 손질을 해서 단행본으로 낼 생각도 합니다. 지식산업사와 얘기 중입니다. 그러면 중국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내는 셈이 됩니다.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온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김영사 발행)>는 지난해에 중국 베이징 인민출판사에서 중국어판으로 나온 것도 저로서는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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