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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설렘 되살려주는 ‘女神’의 매력
열정과 설렘 되살려주는 ‘女神’의 매력
  • 이남재 /한국교원대 음악학
  • 승인 2007.10.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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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풍경_마리아 칼라스 서거 30주년기념예술제를 보고

1977년 세상을 떠난 마리아 칼라스 서거 30주년 기념 예술제가 열리고 있는 의정부 예술의 전당을 다녀왔다. 다음달 9일까지 펼쳐질 이 전시회에는 칼라스가 실제로 입었던 오페라 의상과 이에 딸린 소품들, 그녀의 사진 및 개인적 편지들이 진열돼 있다. 50년대 후반 칼라스가 달라스 오페라에 출연했을 때 입었던 의상들 아래에 적힌 지휘자 레시뇨의 이름을 보면서 필자는 텍사스에서 공부했던 80년대 초, 그의 지휘로 공연된 마스네의 ‘베르테르’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던 무대가 떠올라 잠시 상념에 젖었다.

칼라스가 공연하는 무대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칼라스 회고전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지 새삼스레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페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칼라스가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클린 캐네디 때문에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버림받은 그녀의 인생여정 자체가 더 흥미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칼라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녹음된 칼라스의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기대한 것만큼 아름답거나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각보다 빈번하다. 칼라스가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한 필자로서도 딱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경험상 실제 무대에서 칼라스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잘 들리는 소리였으리라 짐작된다. 칼라스의 무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칼라스를 못내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칼라스의 노래를 녹음으로밖에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음악 녹음은 여행 사진과 닮은 데가 있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으로서는 그 사진을 통해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경험들이 감각적 총체로 되살아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바닥만한 사진이 주는 국한된 시각적 경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칼라스의 실제 공연을 보고들은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녹음된 노래가 자신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되살리는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아무리 연주가 좋고 녹음이 잘 되어 있더라도 국한된 청각적 경험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칼라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공연 무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음악 연주가 무대에서 펼쳐지지만, 특히나 칼라스 같은 성악가들에게는 “인생은 무대이고 우리들은 그 위에 올라선 배우”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으리라. 17세기 초 창안됐을 때부터 오페라는 이미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6세기 다성 음악이 음악 자체의 구조를 중시하는 콰드리비움적인 음악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오페라의 기본이 되는 모노디는 트리비움, 특히 수사학적 음악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콰드리비움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음악관에서 볼 때, 청중의 유무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실제로 소리가 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수사학적 음악관에서는 오히려 들어줄 청중이 없는 음악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수사학의 3대 목표인 ‘감동, 즐거움, 배움’만 성취될 수 있다면 질서의 유무는 관심 밖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바흐의 음악이 콰드리비움적 음악의 차분한 빛을 발한다면, 칼라스는 이 빛에 더해진 수사학적 음악의 뜨거움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칼라스를 회고한다는 것은 그녀가 발산했던 찬란한 뜨거움에 매혹되었던 순간을 되새기는 것일진대, 사람들은 이러한 매혹의 순간을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왜, 무엇 때문에 되새기는 것일까. 곰팡내 나는 서재에서 영원한 진리를 찾겠노라고 젊은 시절을 다 보냈던 파우스트에게 그레트헨은 사랑의 불길을 일으켰다. 마찬가지로 오페라 무대에 선 칼라스는 사람들에게 희미해진 젊음의 열정과 순수한 설렘을 되살려주는 압도적인 여신(diva)의 모습으로 다가왔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여신의 존재 앞에 고개 숙여 경배하고픈 심정에 빠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영원한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유한함을 극복하려했으나 이 모든 노력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파우스트가 순간의 매혹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었던 것처럼, 칼라스가 내뿜는 찬란한 매혹에 한없이 빠져들었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살아있다는 놀라운 기쁨을 재확인하는 엑스타시에 취해 “시간이여 멈춰라”라고 목 놓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황홀경과 현실의 대비는 칼라스 자신의 무대에서와 현실의 삶에 대한 숙고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무대에서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칼라스는 유난히 두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오페라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 이미 페트라르카가 “즐거운 연기가 끝나면 타버린 내 마음 드러나 감추었던 내 삶이 알려진다”고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다듬어진 겉모습의 덧없음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칼라스를 돌아본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덧없음을 돌아보는 것이며, 또한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칼라스를 기다림과 다름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다보면 때 없이 다가오는 뼛속까지 저린 차가운 한기를 녹여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의 뜨거움이 바로 또 하나의 칼라스이기 때문이다.

이남재 교수가 추천하는 칼라스의 대표음반
칼라스는 떠났지만 그녀의 음반은 풍부하게 남았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곡이 수록된 음반을 골라 듣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녀의 전반적인 음악세계를 감상하고 싶다면 최근에 출시된 ‘The Platinum Collection’을 추천할 만하다. 그녀의 대표곡 대부분이 수록된 것으로벨리니의 ‘노르마’와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토스카’등이 실렸다. 반면, 칼라스의 영상물은 희귀한데, 리사이틀 영상물로 ‘토스카’ 2막이 포함된 1958년 ‘가르니에 리사이틀’과 1964년 ‘코벤트 가든 리사이틀’이 각각 출시돼 있다. 무엇보다 토니 팔머가 칼라스 10주기를 기념하여 만든 ‘마리아 칼라스’는 그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DVD다. 그녀의 오페라 공연을 실제로 감상할 수 있다는 면에서 적극 추천한다. 그녀의 이름 중에 칼라스는 예술가를, 마리아는 여인을 상징한다는 시각으로 구성했다.

이남재 / 한국교원대 음악학

필자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노스텍사스대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파우스트와 음악’, 『17세기 음악』 등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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