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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문학권력논쟁 다시보기; 비판적 글쓰기는 무엇인가
[기획특집] 문학권력논쟁 다시보기; 비판적 글쓰기는 무엇인가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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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판적인 글이 가장 좋은 비평이다
최근 ‘이문열 책반환 장례식’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이 시점에서 문학권력논쟁을 재검토하려 한다. 사실 이는 문단 내부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지식인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글쓰기는 지식인들의 실천을 담는 그릇이다. 비판적 글쓰기는 과연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 그 공과를 따져보면서 문학권력논쟁의 의미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문학권력논쟁이 가짜 문제임을 통찰하는 것은 상식의 힘이고, 나아가서 이 상식은 문학이 권력일 수 있는 한 문학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힘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묻는다. (…) 문학권력논쟁의 어디에 이러한 창조로서의 문학의 사회적 입지에 대한 고민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를 포함한 권력 비판론자들이 문학권력논쟁의 와중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은 권력 행사의 정당성과 합리성에 대한 요구였다. (…)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사안에는 오히려 무지하면서, 문학권력논쟁이 가짜라는 심증에 대해서는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는 태도는 분명 모순적이다.”

비판적 글쓰기는 정당한 비평행위인가

길게 뽑은 두 인용문은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와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주고받은 논쟁이다. 여기서 논쟁의 경계가 드러난다. 권력 비판도 권력이라는 의혹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다. 요는 ‘비판적 글쓰기’가 진짜냐 가짜냐 라는 아주 단순한 가름에 있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 글쓰기가 정당한 비평 행위인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이다. 한편 오늘날 지식인들은 현실 감각을 갖춘 지식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자신의 실천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런데 지식인들에게 유효한 실천은 ‘글쓰기’로 집중된다. 어느 지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주장을 펼칠 것인가. 이 고민의 갈림길에서 비판적 글쓰기는 극단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보다는 오로지 한 가지 문제에 골몰하여 상대방의 진리의지를 요구하는 방식. 과연 이러한 방식의 비판적 글쓰기가 지식인들에게 유효한 실천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비판적 글쓰기를 다시 보려는 두 번째 이유이다.

비판과 비평은 다른가. 어원을 캐 들어가면 모두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수 있다. 크리네인은 ‘분할한다’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비판은 철학의 영역에서, 비평은 문학·예술의 영역에서 쓰인다. 어쨌든 비판은 참과 거짓을 명쾌하게 판가름하려는 지적 행위이다. 비판적 글쓰기가 비평의 범주 언저리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평은 무엇보다 해석의 문제이고, 그 차이와 다양성의 인정을 본연의 임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날카로움이 비평가들의 자기의식을 움츠리게 만든 것이다.

비판적 글쓰기는 비판 대상의 반응이 있어야 제대로 존립한다. 비판이란 무엇보다 말을 건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 방식. 그러나 비판적 글쓰기의 울림은 거의 독백에 가까운 것으로 들린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비판적 글쓰기의 문제 설정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과 비판적 글쓰기의 정당함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부정적 권력으로 자승자박에 빠질 가능성. 전자가 아니라면 비판적 글쓰기는 스스로 도달하려는 목적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해석의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텍스트의 의미를 간과한 채 인물비평으로 일관한다거나 사회과학적 비판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면 비판적 글쓰기는 충분히 정당하다. 더 나아가 시시비비를 끝까지 가릴 필요가 있다.

후자가 아니라면, 비판받는 문단 일부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마땅히 대답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스스로 부정적 권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미당 서정주를 신화화하여 비판의 칼날을 부러뜨린 일부 비평계, 조선일보와 이문열 등 일부 지식인의 무책임한 언어도단에 대해서 눈감아주거나 오히려 동조하는 행위들은 중요한 알리바이가 된다. 침묵의 이어짐과 현란한 수사로 본질을 가리는 것은 이러한 알리바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대화의 ‘마당’없는 문학비평계

그런데 비판과 비평을 나누는 것은 적절한 구분법인가. 어느 비평도 비판이 결여된 채로는 비평일 수 없다. 해석이란 무엇보다 비판을 통해 기존 해석과 단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적 글쓰기라는 어법은 부적절해 보인다. 동어반복에 다름 아니다. 비판으로서의 글쓰기가 적절한 표현이다. 그것이 비판적 글쓰기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며 비평 내부에서 대화 가능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으로서의 글쓰기가 비평으로서의 자기의식을 상실한 채 저널리즘에 매달리는 최근의 경향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 인물비평 위주로 흐르는 메타비평, 즉 한 인물의 일관성 여부로 그 도덕성을 가리려는 비평 또한 부적절해 보인다. 그 공격의 대상이 조선일보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 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글쓰기는 단지 비평사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자기갱신을 통해 문학비평이 발전하는 것이라면, 비판적 글쓰기가 불러일으킨 문학권력논쟁은 가치있는 작업이 된다. 문학평론가 신철하의 표현대로 “비평하고 문제를 제기할 마당의 부재”가 비판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마당은 누구의 소유이기에 우리 앞에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는가. 문학권력논쟁이 아직도 진행형인 이유, 새롭게 제기돼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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