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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시대의 반항아들, 세계를 건설하다
‘벨 에포크’ 시대의 반항아들, 세계를 건설하다
  • 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 승인 2007.10.2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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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_ 『세기말 비엔나』 칼 쇼르스케 지음 | 김병화 옮김 | 생각의 나무 | 2007

바야흐로 경성열풍이다.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경성 사람들의 일상이 복원됐다. 식민지 경성에 관한 몇 권의 책들과 드라마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식민지 경성의 일상이 색다르게 보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의 전개에 밤을 잊은 적도 있었다. ‘경성 스캔들’이란 드라마를 보면서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혁명과 사랑의 경계에 선 청춘남녀들. 그들의 삶 속에 집약된 경성의 풍경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내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어딘가 실종되고 결핍된 무언가가 있다는 의혹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건 식민지 경성의 일상적인 풍경과 풍속이 아니었다.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 그들의 내면을 굴착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나는 그런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비록 경성은 아니지만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는 나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세기말 비엔나』는 학문 간의 경계를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지식의 융합을 완성해 낸 쇼르스케의 역작이다. 전통의 해체와 재구성 속에서 펼쳐진 비엔나의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이제 쇼르스케의 내밀한 관조와 뛰어난 통찰력과 유려한 문장으로 되살아난다.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은 오스트리아의 세기말 풍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낙타부대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하지만 그 시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세포분열 중이던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심장부 비엔나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흔히 ‘벨 에포크(Belle poque, 좋았던 시절)’ 시대로도 불리는 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그 ‘좋았던 시절’이란 누구를 위해 그토록 좋았단 말인가.

칼 쇼르스케는 세기말 비엔나의 모습을 문화사적 측면에서 복원해내고 있다. 쇼르스케의 눈에 포착된 세기말 비엔나의 모습은 혁신을 꿈꾸는 ‘자유주의 문화의 자녀들’의 욕망이 들끓는 도시였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교육받은 부르주아들이 보여준 심미적 문화가 비엔나를 휩쓸고 있었다. 19세기 말 비엔나의 지식인들은 르네상스적 교양인이 되기를 원했다. 사회의 전 분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열기가 세기말 비엔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주역들은 바로 문학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후고 폰 호프만슈탈, 도시 건축가인 카밀로 지테와 오토 바그너,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비엔나 분리파(the Secession)의 창시자인 구스타프 클림트, 예술적 반란자인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가, 현대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이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구체제의 잔재를 없애고 자신들의 이상을 반영한 새로운 비엔나를 건설했다.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오토 바그너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새로운 비엔나 건설에 앞장섰다. 구체제의 전유물이었던 도심의 거대한 공터 링슈트라세(Ring Street)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링슈트라세 비엔나’는 영국인들의 ‘빅토리아 시대’나 프랑스의 ‘제2제국’과 같은 한 시대를 특징짓는 상징적인 개념이었다. 비엔나 중심부에서 이루어진 현대적 개발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엔나의 후진성 때문에 남았던 드넓은 공터 덕분이었다. 현대성의 실험실이었던 링슈트라세의 개발은 그 반대자들에게는 전시용으로 급조한 위장 시설이라는 뜻인 ‘포템킨 도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하려고 하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구시대의 귀족과 닮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했다. 비엔나는 다양한 정치적·사상적 이데올로기가 격돌하기도 했다. 비엔나의 지식인들, 최고의 작가뿐만 아니라 화가와 심리학자들은 전통적 자유주의 문화에 기반을 둔 합리적 인간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본성에 더 사로잡혔다. 그들은 “新인간은 그저 합리적이기만 한 동물이 아니라 감정과 본능을 지닌 생물”, 즉 심리적 인간이기를 바랐다.

세기말 비엔나는 ‘거물들의 실험실이 되어버린 모형 세계’였다. 1890년대로 접어들기 전에는 자유주의 대 보수주의라는 고전적인 정치 세력 간의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다. 1895년의 선거에서 비엔나는 칼 뤼거의 반유대주의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는 유대인이든 자유주의 문화의 신봉자들에게는 지독한 타격이었다. 이 무렵 프로이트의 혁명적 꿈은 대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정치와 싸우는 일이었다. 그가 외롭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발견한 정신분석학은 어떤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대항정치적 승리’였다. 그는 정치적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원초적 갈등에 비하면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무역사적 이론’을 자유주의자들에게 제공했다.

새로운 비엔나 건설에 앞장섰던 클림트는 그의 성공에 못지 않게 ‘집단적 오이디푸스의 반항’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대학의 프레스코 벽화가 대표적이다. 그는 그림에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철학, 법학, 의학을 상징화(위의 그림)했는데, 그 중 처음으로 공개된 법학의 그림이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됐다. 기존의 질서를 깨고 선과 악의 가치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 것이 부르주아층에게 강력한 비난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분리파를 창시했다. 분리파의 신조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아버지들과의 단절이었다. 아버지들이란 구시대의 전통을 뜻한다. 이때부터 클림트의 그림도 변화했다. 분리파는 예술이 현대 인간에게 현대의 무거운 삶으로부터 도피해 휴식을 취하는 요양소 구실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인간의 삶을 그렸다. 그러나 클림트는 ‘심리적-철학적 전복자로서’ 사회와 소통하려다 결국 상처를 받고 움츠러들고 말았다.

현대음악의 개척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전통적인 음악 문법을 폭발시키기 위한 ‘화약열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후 서구 음악의 전통인 위계적 조성 질서를 파괴했다. 쇤베르크는 으뜸3화음의 권위와 안정성에 균열을 냈다. 그의 공격대상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전통적 조성 체계였다. 으뜸3화음으로 상징되는 질서의 힘에 도전한 쇤베르크는 고정 조성을 와해시키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구스타프 클림트도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오스카 코코슈카도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 반항아였다. 19세기 세기말 비엔나는 일종의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항”으로 들끓었던 시대였다. 이들 반항아들이 꿈꿨던 것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길들여진 영혼을 갈아엎고, 그곳에 예술과 자유로운 인간 본성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세기말 비엔나와 같이 뜯어 먹고 우려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시대가 있지 않았을까.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세기말 경성’을 이러한 열정과 깊이로 복원하는 책이 나오기를 바란다.

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더 읽어볼 만한 책

쭕 스티븐 컨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박성관 옮김, 휴머니스트, 2004).

 흔히 벨 에포크라 불리는 1880년에서 1918년의 유럽 사회를 연구한 책이다. 문학, 예술, 철학, 심리학, 물리학 등 폭넓은 분야를 포괄하여 다룬 이 책은 문화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쭕 게오르그 짐멜의 『게오르그 짐멜의 모터니티 읽기』(김덕영·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사회의 거대 구조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사회 현상을 분석한 짐멜의 역작이다. 그는 돈, 여행, 유행, 모험, 성, 종교, 편지 등과 같은 일상적인 현상들을 철학적 대상으로 분석하여 모더니티의 새로운 풍경을 읽어낸다. 이 책에 실린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글은 도시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지침서이다.
쭕 이성욱의 『한국 근대문학과 도시문화』(문화과학사, 2004).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도시와 도시문화 현상을 문학적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 문학에 관한 연구서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도시문화를 고찰한 ‘문화연구’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1930년대 식민조 조선의 작가들에게 도시의 거리는 소재와 감각의 출처였고, 거리의 구성방식은 텍스트의 형식 창출에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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