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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 창건일’ 바꾸려 했던 임표 재평가로 ‘복권’
‘홍군 창건일’ 바꾸려 했던 임표 재평가로 ‘복권’
  • 교수신문
  • 승인 2007.10.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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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건군절 80주년과 임표

2007년은 중국에게 여러 모로 의미 있는 해이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단연 홍콩의 중국 회기 10년이다. 지난 7월 1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이 홍콩에 나타났다. 영국의 대처 수상과 더불어 홍콩의 역사적 중국 반환을 매듭지었던 등소평은 1997년 7월 1일, 꿈에 그리던 홍콩 반환을 보지 못하고 다섯 달 앞둔 2월 19일, 93세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인명이란 정말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일국양제’라는 새 틀을 만들어서 홍콩 반환이라는 중국 역사에 길이 빛날 위업을 이룩해냈던 당자는 정작 그날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대신 그의 점지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호금도 주석이 10주년을 맞이하여 국가 지도자로 홍콩을 찾은 것이다.

그는 홍콩 주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사열을 받았다. 현지인 홍콩에 주둔하는 중국 군대는 홍콩 시민에게 우려하는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홍콩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중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사건임엔 틀림없다. 그 인민해방군이 올해로 창립 8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27년 8월 1일의 남창기의를 기념하여 그날을 중국 홍군의 창건일로 잡은 것이다. 그때까지는 국민혁명군 속에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군사 지도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남창기의를 통해 공산혁명군의 결집이 비로소 가능했고 또한 남창기의의 실패를 통해 독자적인 ‘紅軍’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연안혁명기념관에서 나는 중요한 문서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1933년 6월 30일, 중공당 중앙군사위원회가 “8.1 건군절”을 결정하고, 이를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가 비준한 문서 원본이었다. 그때의 주석도 모택동이었다. 중국 군대의 모든 표지에는 반드시 ‘8.1’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또한 1949년 건국 후에 모택동이 지시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이 8월 1일 건군절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9월 9일로 바뀔 뻔 했다. 林彪(린뱌오)가 주동이 되어 추진한 일이었다.

당시 임표는 모택동의 천재성을 외치며 전군과 인민들에게 모택동 어록을 읽도록 강요하며 모택동 신격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모택동의 후계를 노리며 헌법 속에 자신의 승계를 명문화시키기까지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주은래가 주동했던 남창기의가 홍군의 시발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임표 등의 주장이었다. 대신 모택동이 주동했던 추수기의가 참다운 홍군 건군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우겨댔다. 8.1 남창기의가 실패한 뒤인 9월 9일에 모택동도 호남성 장사에서 추수기의를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주은래 총리가 이끌었던 ‘8.1’을, 가장 신성한 모택동 주석이 영도했던 ‘9.9’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건의를 뿌리친 사람도 모택동이었다. 당시 중국의 천하는 오로지 모택동의 세상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모택동이 못 들은 척 눈만 감아도 OK사인으로 받아들여졌던 때였는데도 모택동은 임표 등 ‘반란파’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내세운 이유가, 남창기의는 전국적인 것인 반면에 추수기의는 지역적인 성격이며, 추수기의보다 남창기의가 먼저이며, 그리고 둘 다 당의 결정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아난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절이 올해에 80년이 된 것이다. 올해의 건군절에 특이한 일이 하나 눈에 뜨였다. 임표의 복권이었다. 당의 정식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재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조치이다.

중국의 10대 元帥 중 유일하게 임표의 사진만이 그동안 공식적으로 전시되지 못했다. 사진만이 아니고 임표 자체가 ‘반당 분자’로 낙인찍혀서 실종된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임표에 관련된 여러 종류의 책이나, 잡지 속의 기사들은 시중에 많이 나돌아 다니지만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그는 죽은 존재였다. 정강산 혁명기념관에 들어서면 첫 방에 모택동, 주덕, 팽덕회, 진의, 네 사람의 사진이 걸려있다. ‘정강산 투쟁’의 네 지도자들이다. 군의 서열이나 공로로 보면, 당시 정강산에서 공을 세웠던 임표의 사진도 함께 걸려 있음직 한데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과 얼굴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기념관 전시실을 둘러보면 앞의 네 사람 지도자 외에, 정강산에서 희생된 수많은 병사들의 사진과 간단한 소개가 몇 개의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기에도 물론 임표는 없었다. 생각보다 임표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구나 하는 느낌과, 당분간 임표의 회생은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난 7월 19일부터 전시된 중국 10대 원수의 사진에 임표의 얼굴이 36년 만에 들어갔다.

1971년 9월 13일 쿠데타 음모가 들통 나자 임표는 아내와 함께 소련으로 도망가기 위해 급하게 군용기에 올라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몽골 상공에서 엔진 고장으로 비행기는 추락하고 그 이후 임표라는 존재는 중국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임표의 탈출 사망 사건을 “9.13사건”으로 부른다. 그런 ‘반당 분자’가 재평가되고 있다. 신화통신은 “임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투쟁과 해방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의무가 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의 초상화를 다른 9명의 원수와 함께 전시하기로 결정했다”고 인민해방군 관계자의 말을 신화통신은 인용하고 있었다.
임표는 여러 모로 특이한 장군이며 ‘유일’한 것이 많은 정치가였다. 모택동은 1955년, 중국 건국에 공이 많은 장군들을 10대 元帥로 임명했다. 주덕, 팽덕회, 임표, 유백승, 하룡, 진의, 나영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 등이다. 전번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등소평은 아홉 명의 원수들과 친교를 맺었지만 ‘유일’하게 임표와는 교류가 없었다. 문화대혁명 때는 ‘유일’하게 모택동을 받들어 초기 문화대혁명을 주도했고, 나머지 9명의 원수들을 핍박했다. ‘9.13’사건 이후로 그의 얼굴과 이름만이 ‘유일’하게 10대원수에서 빠져버린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임표에 대한 재평가는 최근 중국의 역사문제에 대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

최근에 나오는 중국의 역사 드라마나 신간 저술들을 보더라도 그런 추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항일전쟁 시기, 국민당과 장개석의 역할과 위상은 그동안 말이 아니었다.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겠다는 의지와 지향 같은 것이 보인다. 공산당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유연성이 눈에 띄는 대목도 없지 않다. 코민테른의 중국 대표로 모택동 노선과 사사건건 맞섰던 王明의 ‘중공 50년’이란 문건은 모택동에 대한 비방과 반론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철저하게 ‘금서’였다. 그 금서가 ‘내부 자료’란 명목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은밀히 읽히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물밑으로 조용하게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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