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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즐거운 살인', '중국유맹사'로 본 그늘의 정치학
[책들의 풍경] '즐거운 살인', '중국유맹사'로 본 그늘의 정치학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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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4 09:40:32
『즐거운 살인』(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이후 刊), 『중국유맹사』(진보량 지음, 이치수 옮김, 아카넷 刊)

‘조폭’이 문제다. 어떤 이들은 그 폭력적이고 저열한 행태가 문화적 유행으로 확산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또 일부 조폭 성향 영화들의 흥행에 비춰 미디어의 폭력성을 문제삼기도 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 논구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폭력이 만연한 사회라며 문명비판의 경향으로 치닫는 목소리들도 있다. 요컨대 ‘조폭’으로 대표되는 폭력·범죄가 하나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런데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사회는 왜 폭력으로 점철돼 있는가. 폭력은 단지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불과한가. 이렇게 폭력의 구조를 따지는 논증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폭력은 단지 현재에만 일어나는 것인지, 폭력에도 역사는 있는지 따져 묻는 통시적 분석 또한 드물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과 진보량의 ‘중국유맹사’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폭력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서적 치료제’로 기능하는 범죄소설

만델은 범죄소설과 자본주의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기본 전제 아래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사실상 범죄소설의 변화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과정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초기 범죄소설에서는 악당이 영웅으로, 산업 자본주의 태동기에는 영웅이 악당으로 그려진다. 반면 독점 자본주의 시기로 넘어오면 거대한 사업적 형태의 범죄가 등장하고, 후기 자본주의에 오면 사업 자체가 범죄가 된다. 이는 범죄소설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게 만델의 분석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 그 자체가 범죄가 된다.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는 사유 재산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사유 재산의 부정, 즉 간단히 말해서 범죄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범죄소설 속에서 범죄가 변화하는 추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범죄소설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거울은 단지 수사로 그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세상 만물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깃들여 있고 범죄소설은 그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그는 1백여명이 넘는 작가와 약 2백여편에 달하는 범죄소설들을 한데 모아 분석한다. 단순히 열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일정한 질서를 이 소설들 속에 부여한다. 하나의 범죄소설이 얼마나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지 일관된 관점을 유지한다. 이에 따라 범죄소설들은 몇 개의 부류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의 변화과정과 유비적 관계에 있다는 게 만델의 생각이다. 범죄소설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객관적 욕구가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대중들은 갈수록 범죄소설에 열광하는가. 그가 보기에 이는 범죄소설이 조장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게 비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대다수 시민들이 범죄소설을 즐겨 읽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정서적 치료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만델은 대중들이 사회의 끔찍한 폭력성을 잊고자 범죄소설이 주는 ‘살인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을 즐긴다고 본다. 본인 스스로 “문학사가 아니라 사회사로 간주”한 이 작업은 지나친 환원 등의 문제로 다소 거칠어 보인다. 하지만 1984년에 간행된 이 책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침이 된다. 미 테러사건과 유사하다며 화제가 된 톰 클랜시의 소설 ‘적과 동지(Debtof Honor)’는 마치 만델의 예언처럼 다가오지 않는가.

진보량의 ‘중국유맹사’는 ‘중국 건달의 사회사, 건달에서 황제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만델의 작업처럼 진보량은 건달 또한 역사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낸다. 이 책에서 건달은 ‘流氓’으로 표현된다. 저자는 유맹을 ‘올바른 직업에 힘쓰지 않고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에 역자는 사전적으로는 “건달·무뢰한 등으로 풀이”되며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해설한다. 유맹은 단어의 기원이 淸末에서 시작되지만,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온 것에 붙여진 총칭으로 볼 수 있다. 유맹은 先秦 시기에는 惰民·游俠, 진한 때는 惡少年,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無賴輩, 수당 때는 坊市惡少, 송대에는 破落戶 등으로 불렸다.

이 책에서 한고조 유방이나 명태조 주원장 등도 유맹 계보에 포함되듯, 유맹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편차와 굴곡이 심하다. 저자가 인용하듯 노신은 “유맹은 대략 두 부류의 사람들에서 생겨났다. 한 부류는 공자의 무리, 즉 유가의 무리이고, 또 한 부류는 묵자의 무리, 즉 협객이다. 이 두 부류는 본래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뒤로 가면서 그들의 사상이 타락하게 되자 차츰 유맹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건달과도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유맹의 계보학이 보여주는 중국 역사

따라서 유맹을 하나로 압축시켜 보여주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유맹이 중국 역사의 각 시기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저자는 유맹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각 시기에 따라 다르게 분석한다. 이를테면 “송대에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과 유맹이 많아진 데에는 봉건 최고통치자의 행위 성향과도 관계가 없지 않다”는 식이다.

이 책을 통해 중국사 전체와 유맹의 관계가 드러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일관된 관점 없이 유맹의 계보를 병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가 불안하고 비리가 만연할 때 건달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다는 논지만큼은 시사적이다. 그것은 조폭에 대하여 다양한 논지를 펼치는 담론들에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이기도 하다. 즉 범죄와 사회구조가 맺는 일정한 관계에 대한 분석이 아쉽다. 위 두 책은 범죄소설, 건달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로도 얼마든지 현실을 분석할 수 있다는 하나의 본으로 남음직하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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