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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성찰 … 中間派 사상 재조명 필요
극단의 시대 성찰 … 中間派 사상 재조명 필요
  • 교수신문
  • 승인 2007.10.0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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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조봉암 사건 진실 규명의 학문적 의미

지난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1958년 진보당 사건과 1959년 조봉암 사형을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비인도적·반인권적 인권 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 사실을 두고 각 언론은 조봉암이 약 50년 만에 간첩 혐의를 벗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은 당시부터 명백했다. 1958년 7월 1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조봉암에게도 간첩죄 부분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단 조봉암의 국가보안법 위반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을 뿐이다. 한국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미국 역시 증거가 빈약하며, 조봉암과 진보당의 대중적 인기에 대한 이승만의 두려움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2심과 대법원 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받아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봉암을 간첩으로 진술한 1심 증언이 2심에서 번복됐지만 도리어 조봉암의 간첩죄는 무죄에서 유죄로 바뀌었다. 그만큼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노력은 집요했다.

진보당 대중적 인기 두려워한 이승만
하지만 조봉암 사형은 이승만 정적 한 사람 제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조봉암과 진보당이 제기한 ‘평화통일론’, ‘피해대중론’, ‘수탈 없는 계획경제론’과 같은 대안적 사상이 논의의 장에서 폭력적으로 거세된 것을 의미했다.
평화통일론은 전쟁의 고통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해 만들어졌다. 그 방법에 있어서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라는 미국과 유엔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실제 내용에서는 남북 공존과 민주주의 확장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했다. 하지만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북진통일론이 이승만 독재와 극우반공 체제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온건한 주장마저도 용납되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면서 평화통일론을 직접 문제 삼았다.

피해대중이란 분단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특권층에게 대중적인 수탈을 당하는 농민·노동자 등 근로대중을 말한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피해대중의 단결과 이들에 기반한 정치를 주장했다. 전쟁과 학살로 생명과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 독재 권력의 억압에 짓눌린 사람들, 관료적·매판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수탈당한 사람들 모두가 피해대중이었다. 반면 피해대중에게 공포와 침묵을 강요했던 이승만 정권은 피해대중론이 북한 조선노동당 규약과 같다고 낙인찍었다.
수탈 없는 계획경제는 피해대중을 위해 제시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었다. 구체적으로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경제의 계획적 통제를 통해 소농 중심의 농업발전, 중소공업 중심의 공업발전을 달성하려 했다. 이는 이미 해방 직후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동의하였던 내용이었다. 또한 조봉암과 진보당은 공산주의 사회의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정치적 자유와 다원주의 보장을 함께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적 지향도 이승만 정권에게는 대한민국의 변란을 기도한 것에 불과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내걸었음에도 극단적 반공주의 이외에 그 어떠한 사상도 용납하지 않았던 시절, 조봉암과 진보당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1956년 선거가 보여주듯 그 대안은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야당, 언론 그리고 미국의 탄압 동조 혹은 방관적 자세 역시 당시 극단적 반공주의의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 잘 보여준다.
약 50년 만에 조봉암은 간첩 혐의를 벗고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풀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조봉암과 진보당이 역사 속에서 온전하게 복권됐다고는 볼 수 없다. 아직도 진실을 규명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조봉암을 죽음으로 몰아간 극단의 시대에 대한 성찰과 함께,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상이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새로운 대안 마련을 위한 역사의 교훈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평화통일론이 지향한 남북의 평화공존과 상호번영은 최근 북핵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우리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 통일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확장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양극화 문제, 비정규직 문제, FTA 문제 등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논란 가운데서 피해대중론과 수탈 없는 계획경제론은 새로운 대안 마련을 위한 역사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번 진상규명을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치적인 터부로 사장된 다양한 대안적 사상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돼야 한다. 해방 이전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아나키즘이나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 가운데서 상대의 사상과 이념을 존중하며 공존과 상생을 추구했던 중간파 사상 등이 대표적 사례다. 역사 속에 등장한 다양한 대안적 사상들에 비추어 오늘을 성찰할 수 있다면 우리의 학문적 자산은 그만큼 풍부해질 것이다.

오제연 / 서울대 박사수료·국사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1950년대 대학생 문화’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1956~1960년 자유당 과두체제의 형성과 운영’등이 있다.

 


 

>>竹山 조봉암(1899~1959)은 누구

三相會議 이후 ‘朝共’과 결별 … 제3의 길 제시

일제 시기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은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 당 위원장을 지냈다. <사진은 간첩혐의로 공판중인 죽산의 모습. 맨 왼쪽>

1899년 소농가정에서 태어나 고향 강화도에서 면서기 등의 일을 하던 죽산은 3·1운동에 참가하고, 이어 수감생활을 경험하면서 민족혁명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1921년 “학생의 성지이며 혁명가들의 피난처”로 여겨졌던 일본 中央대학으로 유학, 무정부주의적 사상단체 흑도회에서 항일운동을 한 후 민족독립과 사회주의 건설의 뜻을 품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직후 죽산은 조선공산당 건설에 주력, 해방 이후까지 당의 중앙간부로 활동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안을 둘러싸고 좌우 친탁-반탁논쟁이 거센 가운데, 조선공산당의 노선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며 결별했다.
전후에는 소련의 세계침략을 규탄해 ‘자유진영의 보루 미국’에 충성을 다짐할 만큼 온건하면서도 동시에 대규모 기간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 측면도 나타냈다. 이 점은  현실주의적 ‘중간노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56년 대선에서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고리채 지불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건 그는 23.8%의 표를 얻어 정계를 뒤흔들었다. 이러한 폭발력이 그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을 긴장케 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결국 급조된 ‘진보당 사건’으로 1959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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